도전에 사용할 수 있는 포켓몬은 네 마리 이상. 소녀는 그 규칙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어내려보았다. 소녀가 데리고 있는 포켓몬은 여섯 마리. 다들 레벨은 비슷했으나...... 소녀는 제 발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된 깁스가 진한 존재감을 풍겼다. 진통제를 꼬박꼬박 먹지 않으면 은은하게 통증도 올라왔다. 발 뿐만 아니라 온몸이 욱신거렸다. 틀림없이 여기저기 멍투성이겠지. 더 걱정시키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 무리는 금물이었다.
라프라스는 거다이 개체이니 만큼 반드시 나가야하니, 라프라스 위에 앉아서 승부를 겨루지는 못하고. 그렇다면...... 소녀는 차례차레 책상 위에 몬스터볼을 올려놓았다. 선봉장으로 라프라스, 마지막은 샤미드. 그 중간에서 단단하게 버텨 줄 포켓몬은 엠페르트. 세 마리는 망설임 없이 결정하니 다른 세 마리는 고민이 남았다. 골덕, 플로젤, 빈티나. 어느 쪽이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제 사랑스러운 포켓몬들. 전부 내보내도 별 문제는 없었으나......
소녀가 개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물 포켓몬 골덕. 특별한 신통력을 사용하는 포켓몬. 에스퍼 타입은 아니지만 에스퍼 기술도 배울 수 있는 게 여럿 있었다. 빈티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람을 받쳐 줄 수 없었고, 플로젤은 람보다 작아 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목발을 짚고 싸우다가는 흥분해서 넘어질 게 뻔했으니, 소녀의 선택지는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이번에 싸울 수 없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골덕."
이번엔 내가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게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래요? 소녀의 속삭임에 몬스터볼 속의 골덕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쟁이 골덕은 고라파덕 시절부터 제 트레이너를 가장 좋아했으니까. 여섯 마리 모두 걱정 어린 눈으로 제 트레이너를 보고 있었으니,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역할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 한 마리.
"......?"
플로젤이 강하게 제 몬스터볼을 흔들었다. 제 친구가 이번에 트레이너의 곁을 지키기로 마음먹었으니, 배틀 필드에 설 수 없는 친구와 같이 저도 이번에는 소녀의 뒤에 서 있고 싶었다. 싸운다면 골덕과 같이 싸우고 싶으니까. 그리고 심술을 섞어 말하자면, 골덕 하나에게만 제 트레이너의 전부를 맡기는 건 불안하지 않은가. 골덕, 플로젤. 두 마리가 자의와 타의를 섞어 배틀에서 나가기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네 마리 제한을 채우기 위해 남은 건 한 마리. 마지막으로 빈티나가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들어올린 소녀가 잠시 제 포켓몬과 시선을 나눴다. 괜찮겠나요? 수줍은 빈티나를 위한 부드러운 걱정을 빈티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빈티나를 포함하여 네 개의 몬스터볼을 허리에 묶은 벨트에 단단히 찼다.
남은 두 마리의 몬스터볼은 소중하게 끌어안았다가, 둘 모두를 꺼냈다. 플로젤, 날 조금 잡아줘요. 골덕, 염동력으로 나를 살짝만 띄워 줄래요?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플로젤이 람의 손을 잡고 골덕의 이마가 신비하게 빛났다. 그럴듯하게 서는 시늉을 할 수 있게 된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약속시간이었다.
* * * youtu.be/zWUTOxzkwmY * * *
어둡지만 인기척이 느껴진다. 숨길 수 없는 긴장감도. 소녀는 몇 번이고 짧게 숨을 뱉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손을 잡아주는 플로젤과 지탱해주는 골덕이 없었으면 발밑도 똑바로 보지 못하다가 홀랑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흰 자작나무 문을 거쳐 좁은 길을 따라가니 그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울창한 숲 한 가운데에서 다정하게 기다려주는 존재가 있었다. 거대한 배틀 필드가 있었다. 그리고 심판의 위치에서 눈인사로 가볍게 인사해주는 사람도. 람은 양 손을 감싸 단단히 주먹을 쥐었다. 부드러운 녹색 시선이 일렁이는 푸른 시선을 상냥하게 응시했다.
"어서 와요, 람."
"왔어요, 샤론."
"다리는 괜찮나요?"
"괜찮아요."
"봐 주지는 않을 거에요."
"그럼요."
긴 바람이 불었다. 잔파도 휩쓸리듯 잎사귀들이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람은 제 가슴에 달려있을 심장이 귀로 올라와 두근두근 달음박질이라도 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긴장해 본 건 태어나 19년 인생에서 거의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를 처음 만나 그 손을 잡기로 정했을 때도 딱 이만큼 긴장했었는데. 방금 나눈 대화는 아무런 사심 없이 담은 간단한 대화인데 소녀는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인지,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녀가 젖은 손을 몇 번 쥐락펴락한 뒤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바다 색 눈동자가 격랑을 맞은 듯 흔들리면서도, 폭풍우 속 등대처럼 빛만큼은 뚜렷했다.
"준비가 되셨다면 제 맞은 편에 서서 몬스터볼을 들어주세요."
샤론의 손에 들려있는 타이머볼을 한 번 보고, 람도 제 몬스터볼을 쥐었다. 길게 숨을 뱉으니 플로젤이 다시 단단히 람의 반대쪽 손을 맞잡았다. 골덕의 에스퍼 기운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소녀의 몸에 맴돌았다. 소중히 키웠고, 시합에 참가하지 않는 두 마리 포켓몬의 마음을 느끼며, 소녀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똑바로 제 앞의 동갑내기 선생님을 향해, 소리 높여 외쳤다.
"......역시 뭐든 한 번 직접 부딪혀보지 않으면 이길 수 없겠죠! 도전하러 왔어요, 샤론!"
"좋아요. 당신과 포켓몬의 요동치는 마음의 파동이, 그 유대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제가 「심판」 하겠습니다!"
배틀 직전, 람은 샤론의 등 뒤에 서 있는 라티오스와 잠깐 시선이 맞았다. 라티오스는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숲이 울릴 정도로 길게 포효했다. 배틀을 시작합니다! 심판으로서 자리에 서 준 포말하우트가 외치는 목소리와 포켓몬의 울음소리는 거의 동시에 울려서, 시작을 개시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트레이너로서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모자를 멀리 집어던지고 두근거리는 긴장도 모조리 열졍으로 돌려버리며 소녀가 눈을 치켜떴다. 제일 먼저 나올 상대는 아마도 현재. 그렇다면 이쪽도 제일 튼튼하고 제일 딱딱한 상대가 나서줘야했다. 이미 선봉장은 정해뒀으니! 소녀의 팔에 차고 있는 다이맥스 밴드가 신비한 빛으로 반짝였다. 오래 호연에 살았고 그 다음으로 관동에서 살던 소녀에게는 사실 꽤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제 포켓몬이 최선을 다한 모습임을 알기에. 소녀는 제 머리통보다도 커다랗게 변한 몬스터볼을 쥐고,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제 몸이 붕 뜰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한 라프라스가 소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나자마자!"
"라프라스! 이 꽉 깨물고 버텨요!"
거다이맥스는 뛰어난 힘이지만, 장점이 있는만큼 단점도 있다. 덩치가 거대한만큼 대부분의 공격을 피할 수 없고, 상대의 공격은 빠르고 날카롭다. 람의 명령에 거다이라프라스가 순간적으로 몸을 잔뜩 긴장시켰다. 공격은 등장과 동시에 눈 깜짝할 찰나였다. ──쾅! 창파나이트의 무시무시한 일격은 폭격이라도 날아오는 것처럼 묵직한 소리가 났다. 버텼는가? 버텼다면 다음에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소녀의 시선이 필드를 빠르게 훑었다. 거대해진만큼 위력이 강하고, 그렇기에 맞고 버티고 제대로 맞추는 게 중요했다. 트레이너가 명령하는 타이밍과 그걸 듣고 실현하는 포켓몬의 순발력, 호흡 모두가 맞아야 했다. 상대는 작은 만큼 피하기도 쉽고 맞추기도 쉬우니까.
"현재, 인파이트!"
"다이월로 버텨요! 그리고 곧장 다이스트림!!"
강력한 다이월을 강력한 인파이트로 두들기는 소리는 어쩐지 우산 위에 우박이 떨어지는 것과 유사했다. 체감상으로 우박보다는 운석에 가깝기는 했지만. 방어막을 쳐 인파이트를 버틴 뒤, 머리로 창파나이트를 길게 튕겨낸 거다이라프라스가 그대로 강력한 다이스트림을 쏟아부었다. 거대한 만큼 스케일도 달라서, 마치 폭포가 몰아치는 소리가 났다. 그걸 샤론의 명령을 받아 파로 만든 검으로 어떻게든 갈라내서 충격을 감소시키는 창파나이트는 무시무시했지만.
허나 이 역시 데미지가 아예 제로는 아닐 터. 소녀는 라프라스를 한 번 올려다보고, 눈앞의 샤론을 보았다. 팔을 걷어붙이고 전심전력으로 싸워주는 상대를. 그리고 소리쳤다.
"다이어택!!"
"브레이브버드!!"
두 포켓몬의 전력을 쏟은 공격이 동시에 충돌했다. 충격파가 불어오는 것을 버티며 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모래먼지 자욱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필드를 파악한 차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창파나이트, 시합 불가능!"
"무한! 원수갚기!"
"노래해요, 라프라스! 버텨요!"
거다이선율이 펼쳐지며 무지개빛 베일이 숲 가운데 필드에 내려앉는 것과, 타격귀의 무시무시한 원수갚기가 라프라스를 후려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라프라스가 긴 울음소리를 흘렸다. 소녀는 거대한 라프라스를 한 번 올려다보고, 혀를 차며 필드를 보았다. 어느 정도 회복은 했지만 벌써 두 마리 째. 만나자마자와 브레이브버드를 버틴 것도 거다이맥스한 라프라스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라프라스는 슬슬 무리다. 람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렇다면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게 다음 포켓몬을 위한 방도일 터. 소녀는 방어 명령도 회복 명령도 포기하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제 파트너가 해내 줄 것을 믿으며!
"전력으로 다이스트림!"
"갈라버려요, 무한! 태권당수!!"
강력한 물 공격과 바다도 가르는 태권당수가 충돌한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제대로 서지도 못할 정도의 강력한 다이스트림을 가르고 타격귀는 제 트레이너의 지시대로 라프라스를 후려쳤으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공격하던 거다이라프라스가 온 힘을 다해 후려치는 다이어택까지는 견디지 못했다. 거대한 충격파로 날아갈 뻔한 것을 잡아준 것은 골덕이었다. 공격의 충격도 충격이었으나 거다이라프라스의 패배와 동시에 거대화가 터져서 사라진 여파가 컸다. ──라프라스, 타격귀, 시합 불가능! 몬스터볼로 돌아온 라프라스를 소중히 끌어안았다가 다시 허리에 매달며 람은 두 번째 포켓몬을 꺼내들었다. 시합 전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순서를 많이 고민했고, 또 고민했지만. 그럼에도 지금 나서야 할 아이는 이 아이였다.
"나와요, 미로슈! 당신이 강해졌다는 걸...... 보여줘요!"
"바인, 지지 말아요! 마하펀치!"
"파도타기로 피해요!"
빈티나가 긴장했다는게 트레이너인 람에게까지 여실하게 느껴졌다. 하기야 당연히. 성격적으로도 포켓몬 개체적으로도 빈티나는 배틀에 익숙한 포켓몬이 아니었다. 싸울 기회를 많이 줬던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샤론이 내보낸 포켓몬은 상성적으로도 불리한 버섯모. 하지만 빈티나가 아닌 미로슈는 앞으로 배틀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어떻게든 불러낸 엷은 파도로 마하펀치를 피하기 위해 허공을 유영하던 빈티나였으나, 끝내 번개처럼 날아오는 마하펀치에 후려맞아 멀찍히 날아가는 모습에 람이 입술을 깨물었다. 야생에서도 크게 싸워보진 않았을 아이니, 순간적인 요령이 부족할 것은 이미 예상했다. 그럼에도 가슴이 아팠다. 한 대라도 더 맞으면 빈티나는 일어서지 못하리라.
소녀가 심판으로 서 있는 포말하우트에게 눈짓하고 빈티나에게 회복약을 던졌다. 회복제한은 두 번. 이걸로 한 번 사용하는 것은 뼈아플지도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빈티나가 쓰러지면 안 됐다. 라프라스 정도로 일해주리라 과욕을 부리지 않으니, 이 한 마리. 버섯모만큼은 이겨야 했다. 저에게 주어진 회복약으로 가까스로 상처를 회복한 빈티나가 람을 응시했다. 조금은 겁을 먹고, 통증에 괴로운 눈. 하지만......
"이겨요, 미로슈! 할 수 있어요!"
"좋아요, 한 번 보여주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주는 당신이 있으니 싸우겠노라 결심한 눈! 아직 나약한 빈티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포켓몬에게 믿음을 싣고 소녀가 명령했다.
"몸통박치기!"
"스카이업퍼!!"
높이 떠밀듯 공격해오는 매서운 격투 공격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를 악물고 빈티나 역시 몸을 날려 제 최고의 공격을 넣어냈다. 이런 일 대 일 시합은 어쩐지 저도 격투 타입이어야 할 것 같네요! 배우고 있는 격투 기술은 아무것도 없지만! 람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외치며 한 번 매섭게 웃었다. 반대편에서 샤론도 비슷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 빈티나로 이런 배짱 싸움을 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정말이지 모를 일만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걸 잘 하는 포켓몬은 지금도 열렬하게 몬스터볼 밖을 응시하고 있을 엠페르트겠지만, 지금은 잘한다 못한다를 따질 때는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몸통박치기!"
"다시 한 번 스카이업퍼!"
체력과...... 배짱싸움이에요! 다시 한 번, 이길 때까지, 몸통박치기! 서로 공격과 회피를 모두 포기한 공격이 묵직하게 충돌했다. 쾅, ...쾅!, ......쾅!! 두개도스의 박치기 싸움마냥 몇 번이고 부딪히는 사이, 트레이너들의 눈매는 점점 매서워졌다. 제 포켓몬들이 약해지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이 끊어지지 않음을 똑똑히 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먼저 쓰러진 쪽은 좀 더 작은 쪽이었다.
"빈티나, 시합 불가능!"
그리고 뒤이어 큰 쪽도.
"버섯모, 시합 불가능!"
고마워요 미로슈. 고생 많았어요. 제 몬스터볼로 돌아온 빈티나에게 람이 작게 속삭였다. 부탁한 것 이상으로 빈티나는 아주 잘 해 줬다. 남은 포켓몬은 세 마리, 이쪽은 두 마리. 기대 이상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잘 풀어왔지만...... 소녀는 마른침을 삼키고 크게 호흡했다. 람이 남겨둔 포켓몬들도 오래 갈고 닦은 아이들이지만, 샤론이 지금부터 꺼내들 아이들도 그와 꼭 같을테니까.
하지만 긴장되는 만큼 즐겁다. 무서운 만큼 재밌다. 떨리는 만큼......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물 포켓몬들과 샤론의 포켓몬을 상대하는 일에, 가슴 떨릴 만큼 설레고 있었다.
"엠페르트!"
"코제트!"
몬스터볼에서 뛰쳐나와 필드에 나서는 순간 두 형체가 곧바로 얽혀들었다. 엠페르트의 메탈크로우와 루카리오의 코멧펀치가 날카롭게 충돌했다. 강철타입 기술 특유의 금속음이 허공을 채우고, 눈으로 둘의 움직임을 쫒던 트레이너가 매섭게 외쳤다.
"파동탄!"
"아쿠아제트로 피해요!"
온몸을 물로 감싼 엠페르트가 날렵하게 허공을 갈랐다. 푸르스름한 파동탄이 폭탄처럼 매섭게 그 뒤를 추적했으나 물 쪽이 조금 더 날렵했다. 가장 긴 시간 소녀와 함께했던 엠페르트는 어제 제 주인을 제대로 못 지켰다는 분노에 잔뜩 화가 나서, 도리어 아주 냉정해져 있었으니까. 바로 그런 점에서 엠페르트는 주인과 꼭 닮아있었다. 차분하게 아쿠아제트로 파동탄을 회피해낸 엠페르트의 경로를 확인하며 일순 소녀가 웃었다.
"거기서 멈추고 바다회오리!!"
한 바퀴 빙글 돌아 아쿠아제트를 풀어낸 엠페르트가 곧장 거대한 바다회오리를 불러내 그 안에 루카리오를 단단히 가뒀다. 푸르스름한 바다 속 루카리오의 붉은 눈이 당황한 듯 허공을 헤맸다. 샤론이 소리높여 외쳤다.
"코제트, 진정하고 코멧펀치로 바다회오리를 깨는거에요!"
"그 전에 끝내는 거에요, 엠페르트! 하이드로펌프!!"
루카리오의 코멧펀치가 바다회오리를 터트리는 동시에 엠페르트의 강력한 하이드로펌프가 루카리오를 먼 곳으로 처박았다. 일어나지 못하는 루카리오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가 승패를 갈랐다.
"루카리오, 시합 불가능!"
이제 남은 포켓몬은 두 마리. 숫자 자체는 같다지만...... 람은 긴장으로 굳어지는 뺨을 슬슬 매만졌다. 몇 번이나 돌려봤던 영상에서 여기까지 왔던 동기들도 여럿 있었다. 덕분에 어떻게 싸울지 내내 생각할 수 있었으나, 이 앞은 이기기 위한 심상을 똑바로 짜지 못하고 왔다. 그만큼 강한 상대였다. 몇 번이고 보고 또 봐도, 어떻게 이길지 궁리해도, 마지막 상상 속의 샤론과 그 포켓몬들이 고개를 처들고 있다가 우아하게 승자의 인사를 건내고는 했다. 샤론의 강력한 포켓몬들. 여기서부터는 정말 자신의 순발력과 트레이너로서의 센스... 그리고 포켓몬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엠페르트는 여전히 필드에 서 있었다. 데미지는 적게 받았고, 무엇보다 지금 투기가 넘친다. 람이 꺼낼 수 있는 가장 강한 카드였다. 그리고 람이 누구보다 믿고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은은한 긴장과 그 이상으로 필드를 휩쓰는 흥분을 느끼며 샤론도 웃었다.
"다른 포켓몬보다 표정이 좋네요. 이 아이가 지금의 람이 내보내는 최고겠죠? 예전에 포켓잡으로 건내드릴 때에는 작은 팽도리였는데. 많이 컸네요."
"그게 티가 나나요? ......뭐, 그렇죠. 샤론 덕분에 함께 졸업할 수 있게 되었네요."
"후후... 멋지게 성장했는걸요. 그럼 저도 그에 걸맞는 상대를 해야겠죠."
상냥하게 웃던 샤론이 다시 눈에 투기를 담고 볼을 들어올렸다. 다음 순서로 샤론의 볼에서 튀어나온 포켓몬은 차분해보이는 엘레이드였다. 론도. 샤론의... 에이스. 소녀와 엠페르트가 엘레이드의 칼날같은 분위기에 미처 긴장하기도 전에, 샤론의 손목에 찬 메가뱅글도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이지만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앞의 트레이너가 자신의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음을. 단 한 번만이라도 판단을 잘못한다면 곧장 쓰러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하얀 얼굴에 푸르스름한 긴장이 역력하게 어렸다.
"지금부터는 결정타입니다, 론도! 메가진화!"
"엠페르트! 우리 역시도 전력이에요!"
긴 칼날 같은 팔과 망토처럼 늘어지는 차림새. 그야말로 고대 기사에 어울리는 모습의 메가엘레이드는 배틀이라는 형식으로 소녀가 이제껏 싸워본 그 누구보다도 강함이 자명했다. 허나 메가진화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처럼 뻔뻔하게 고개를 쳐든 엠페르트도 어디 가서 질 녀석이 아니니까. 엠페르트는 지금 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포켓몬이고, 그 이상으로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자신의 첫 번째 파트너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엠페르트가 가장 강하리라 믿었다. 이기더라도 지더라도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고를 해 줄 것을 믿었다.
"사이코커터!"
"메탈크로우로 받아쳐요!"
쏟아지는 보랏빛 칼날을 강철같은 날개가 차분하게 쳐냈다. 그 사이 샤론의 선뜩한 명령이 날카롭게 이어졌다. 품으로 파고들어요. 야습! 쏟아지는 사이코커터 사이로 메가엘레이드가 능숙하게 제 몸을 숨기고 그림자처럼 접근했다. 찔러오는 야습을 피하지는 못할 터. 소녀는 잠시 명령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심해처럼 잠시 참잠했다. 이기기 위해서, 좀 더 배짱을 부릴 필요가 있었다. 제 포켓몬을 믿고, 조금 더 대담하게. 절벽에 몰아치는 파도처럼, 거센 물살처럼.
야습을 맞을 수밖에 없는 타이밍에서, 소녀는 그제야 제 포켓몬에게 명령했다.
"버텨요! 바다회오리!"
"똑같은 수는 통하지 않아요! 론도, 인파이트!"
"바다회오리의 물까지 모두 흡수해서 아쿠아제트로 흘러넘겨요!"
"피하게 두지 말아요! 사이코커터!"
노도같은 트레이너의 명령이 쏟아지고, 그 짧은 틈새에 이어지는 명령을 포켓몬들은 충실히 따랐다. 야습이 배에 박히는 순간 충격을 견뎌내고 넓게 퍼진 파도같은 바다회오리를, 메가엘레이드는 능숙하게 강력한 인파이트 한 방으로 박살냈다. 어차피 걸릴 거라고 예측하여 펼친 기술은 아니었으니 아쉽지도 않았다. 엠페르트가 아닌 바다회오리를 노리며 중심축이 빗겨간 사이 밀접하게 붙어있던 엠페르트가 뛰어올라 아쿠아제트로 거리를 벌렸다. 메탈크로우를 배우고 있었으나 접근전에서 유리한 건 당연히 격투 타입인 상대편었으니 이쪽은 최소한 중거리전으로 거리를 벌려야했다.
샤론 역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매섭게 뒤를 쫒아 거리를 잡을 수 있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사이코커터를 보며 람은 숨을 한 번 뱉고, 아주 짧은 찰나 망설였다가, 끝내 외쳤다.
"엠페르트, 어느 정도 맞는 걸 감수하고 그대로 돌아요! 피하지 말고, 그대로 아쿠아제트로 돌격해요!"
"대담한 수네요! 하지만 견딜 수 있을까요? 론도, 옵니다! 정면으로! 인파이트!"
허공을 유영하던 엠페르트의 아쿠아제트가, 그대로 메가엘레이드에게 정면으로 돌격했다. 그리고 그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동선 끝에서 기다리던 메가엘레이드도 거침없이 팔을 휘둘렀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연기가 뿌옇게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필드에서, 람은 그저 포켓몬이 버텨냈을 것임을 믿고 외쳤다. 여기서 쓰러지면 끝이었다. 그걸 둘 모두 알고 있으니, 람은 엠페르트가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제발...! 버텨요, 엠페르트! 하이드로펌프!!"
그리고 트레이너의 목소리에 포켓몬이 답했다. 푸르스름한 물의 선이 곧게 상대에게 뻗었다. 위력을 받아내지 못하고 심지어 멀리 처박히기까지 할 정도로 강력한 하이드로펌프였다. 정진정명 정면으로 들어갔으나, 그걸 맞고도 상대는 일어났다. 어떻게든 버텨내는 메가엘레이드의 모습에 람은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무시무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데미지는 충분히 입혔다. 람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메가엘레이드를 노려보다가, 끝내 데미지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엠페르트를 다정한 눈으로 보았다. ──엠페르트, 시합 불가능!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굉장한 하이드로펌프네요. '급류' 군요?"
"맞아요. 노린 거였는데 그걸 버티다니. 너무 굉장한 거 아니에요, 샤론?"
엠페르트의 특성. 급류, 자신의 체력이 ⅓ 이하일 때는 물 타입 기술의 위력이 1.5배 오른다. 마지막이라는 오기에 급류 특성까지 더해진 하이드로펌프를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일어내는 메가엘레이드의 굉장함에 람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래도 엠페르트는 승리 바로 앞까지 자신을 보내주었다. 그렇다면 트레이너로서, 힘겨운 명령을 해던 자신은 이겼노라고 말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은 포켓몬은 고작 이 아이뿐이지만...... 마지막 순서로 둘 만큼 이 아이를 믿는다. 그리고, 배틀을 할 때는 반드시 이기겠노라고 생각하며 싸워야 하니까. 람은 고개를 처들고 엠페르트와 꼭 같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마지막 포켓몬을 내보냈다.
"마지막은 당신밖에 없죠! 샤미드!"
"론도! 파동탄!"
"엠페르트가 노력해준 걸 보았겠죠, 샤미드! 파도타기로...... 모조리 쓸어버려요!"
이 아카데미에서 받은 두 번째 파트너. 트레이너를 위해 물 타입으로 진화해주었던 아이가 필드에 섰다. 트레이너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물 포켓몬이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아이가 이를 세우고 파도를 불렀다. 정말 좋아하는 라프라스도, 귀여워하는 빈티나도, 가끔은 무섭지만 든든한 엠페르트도 트레이너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다해 싸우는 것을 볼 속에서 똑똑히 보았다. 매일 장난을 치지만 다정한 골덕도, 마찬가지로 늘 골덕과 투닥거리지만 보기만 해도 즐거운 플로젤도 주인의 뒤에서 자신을 믿고 자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신뢰를 등에 업고 마지막 포켓몬이 된 샤미드는 절대 질 수 없었다.
작은 체구에서 터져나왔노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높고 공격적인 울음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저에게 날아오는 파동탄을 모조리 버텨내며 불러낸 강력한 파도타기가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던 메가엘레이드를 휩쓸었다. ──엘레이드, 시합 불가능!
"......그럼 저도 마지막 포켓몬이네요."
"그렇네요!"
그 사이 람이 샤미드를 불러 마지막 치료약을 썼다. 엠페르트가 버텨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끼다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자, 이제 우리 모두 만전이에요, 샤미드. 할 수 있죠? 신뢰를 담은 트레이너의 그 말에 샤미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전설의 이름을 가진 포켓몬이어도, 그래도 이길 수 있었다. 저는 바로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이 말의 신뢰를 위해서 이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기를 다짐했으니까.
"라티오스!"
"샤미드!"
샤론의 등 뒤에 서 있던 라티오스가 드디어 필드에 섰다. 이제껏 내내 고요한 눈으로 두 사람의 시합을 보고 있던 무한포켓몬이, 내내 자질을 시험하고 있던 특별한 포켓몬이! 고집쟁이 샤미드는, 배짱 좋게 전설의 포켓몬을 앞에 두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눈은 라티오스의 움직임을 놓칠까 내내 날카로웠다. 주인이 저들을 무릎에 올리고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두꺼운 책을 넘기고 라티오스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주던 밤을 기억했다. 상냥한 포켓몬, 싸움을 좋아하지 않으며, 영리하고, 다정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을 따른다는 포켓몬......
그렇다면 너는 이미 내 주인의 것이야. 에스퍼 타입을 포기한 샤미드는 기꺼이 예지했다. 너는 우리 막내보다도 새 막내라고!
"용의 파동!"
"하이드로펌프!"
두 가지 강력한 기술이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샤미드는 그 직후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람의 옛 지시에 따랐다. 둘 사이의 보잘 것 없는 약속이었다. 람은 물처럼 녹는 샤미드를 정말 좋아했으니까. 샤미드는 녹을 수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녹아서 방심을 노리도록 해요. 배틀도, 싸움도. 알았죠? 진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했던 말이지만 샤미드는 여전히 그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완전히 녹아버린 샤미드가 빠르게 라티오스의 바로 아래로 이동했다. 그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호수처럼 고요하게.
"라티오스! 샤론! 이게 지금 우리들의...... 전력!"
파도타기!! 그림자 속에 녹아 숨어있던 샤미드가 곧장 튀어나와 푸른 파도를 불렀다. 숲을 모조리 휩쓸 정도로, 대지를 감싸고 배틀의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진 필드를 모조리 가라앉힐 정도로 강력하게. 바다는 하늘 위에 오를 수 없으나, 구름을 찌를 듯 높이 치솟는 파도가 결국 송곳니를 드러내도록.
그리하여 끝내, 하늘을 나는 무한포켓몬을 땅으로 떨어트리도록.
"하아...... 하아......"
"후우......"
소녀가 긴장을 담아 라티오스를 노려보았다. 끝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렇다기에는 시합종료의 목소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짧게 기절한 듯 샤미드의 발밑에서 움직임이 없던 라티오스는 곧 움찔 몸을 떨더니, 곧 샤미드를 떨쳐내고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2차전인가요.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가늘어지려는 찰나, 라티오스는 샤미드에게서 고개를 돌려 람을 보았다. 그리고 투기 없이 부드럽게 날아 소녀의 머리 위에 섰다. 배틀의 긴장감은 문득 날아가버린 뒤였다.
.....? 소녀가 의문을 담아 라티오스를 응시하고, 샤론을 보았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헌데 눈앞의 무시무시한 트레이너였던 소녀는 어느 틈엔가 다시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넓은 숲처럼 잔잔하게.
"라티오스, 시합 불가능. 따라서 승자, 람 님입니다."
"......?"
"라티오스를 쓰러트려 기절시킨 순간부터 라티오스의 시험은 끝났어요, 람."
.......승자 람 님. 람 님이 누구더라...... 난가? 소녀의 머리가 무디게 돌아갔다.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트레이너보다 포켓몬들의 반응이 더 빨랐다.
골덕이 람을 지탱하던 염동력을 지우고 그 몸을 한껏 끌어안고, 플로젤이 질쏘냐 마찬가지로 주인을 끌어안았다. 필드에 서 있던 샤미드가 곧장 달려와 소녀의 가슴팍에 제 머리를 부볐다. 세 마리의 어택에 쓰러진 소녀가 비명과 감사를 동시에 외쳤다. 억, 아파요. 아파요! 골덕, 플로젤, 으윽. 샤미드. 나야말로 고마워요. 너무 기쁜데 조금만 진정, 꺄악! 세 마리 포켓몬의 뺨을 핥아오는 혓바닥이며 묵직한 몸무게며 저를 쓰다듬어달라 어필해오는 머리통을 이기지 못하고 깔려 어쩔 줄 모르는 아카데미생 트레이너를 보며, 심판이자 심판자로서 서 있던 두 명의 트레이너가 잠시 마주보고 웃었다.
라티오스가 조용히 람의 모자를 주워 와 왕관처럼 소녀의 머리위에 씌워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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