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법사가 넷.......
숨을 이어갈 기력조차도 모조리 빼앗긴 소녀는 죽은 가지처럼 가만히 서서 바닥을 응시했다. 텅 빈 봄꽃색 눈동자는 세상을 흐릿하게 비췄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 다음에는 눈물이 났다. 하염없이 울고 나니 끝도 없는 절망에 빠진 듯 우울했으며....... 끝내 소녀는 무기력해졌다. 눈물을 흘릴 힘도 없었다. 못 볼 꼴이 되어 형편없어진 얼굴로 소녀는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말라비틀어진 꽃송이 하나가 소녀의 어깨를 대신 적시고 떨어졌다. 귀에 멀리서 들리는 이명이 들렸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어린시절부터 쌓아 온 우정을 기반으로 견고하게 쌓았던 신뢰가 발끝까지 모조리 무너지는 감각에 소녀는 숨을 삼켰다. 목이 졸리는 것보다 괴로웠다. 정말로 사랑했고......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태엽 하나가 망가져도 완전히 못쓰게 되어버릴 정도로 연약한 신뢰가 아니었기에 소녀는 그것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노랫소리게 끊어지는 잡음이 섞여도 아름답게 들을 수 있었기에 그랬다. 좋아했으니까. 정말 많이 좋아했으니까. 완전히 망가져 산산조각나 저를 찌르는 순간까지도.
붙잡고 있던 손, 끌어안고 있던 몸뚱아리 전부에 상처를 입고, 소녀는 피 흐르는 무언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방치하기로 했다. 뿌옇게 세상을 비추는 연두색 눈동자에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도무지 정할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혼란만 그저 소녀의 안에 푹 고여 있었다.
몽몽...... 몽몽. 그녀의 작은 새. 그녀의 가족이자 첫 번째 벗이자 형제였던 몽몽이 보고 싶었다. 가지에 장식했던 장신구를 생명줄처럼 손에 부여잡고 소녀는 가쁘게 숨을 뱉었다. 소녀가 무엇을 선택하던, 어떤 길을 걷던 다정하게 울음소리를 내 주던 그가 보고 싶었다. 뺨에 달라붙어 온기를 나눠주던 몽몽이 보고 싶었다. 모조리 무너진 신뢰 속에 망자를 붙잡고 소녀는 다시 울었다. 이미 형편없는 얼굴에 다시 눈물이 길을 열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
괴로워...... 나 힘들어, 몽몽....... 숨이 막혔다. 꺽꺽 소리내며 소녀는 땅에 엎드려 오열했다. 믿음을 배신하고 신뢰를 뿌리치고 흑마법사의 손을 잡은 벗들의 존재가 괴로웠다. 그들에게 제 신뢰 한 조각, 믿음 한 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겠지만. 이는 그저 소녀의 이기심에 가깝겠지만...... 그들에게도 각자의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허나 그 선택을 이해하고 납득해주기에, 소녀는 충분히 한계였다.
방학이 시작하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급하게 이사를 가야 했다. 이웃들을 모조리 두고 가족들의 손에 이끌린 이사였다. 그 마을은 흑마법사에게 점령되어 이제는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소녀의 첫 번째 상실은 그토록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그리고 3년이 조금 넘었을 때 가족들이 죽었다.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흑마법사와의 전투 끝에 죽어 돌아왔다. 전사통지서와 팔 하나, 손가락 하나, 뼛조각 몇 개. 관에 넣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두 번째 상실은 내장을 모조리 헤집어 갈기갈기 찢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 모든 것을 견뎌냈다. 남은 가족을 끌어안고, 새 가족을 들이고,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일상을 보내고, 먼 곳의 친구에게 연락해서 이웃에게 그러는 것처럼, 소소한 대화를 하고....... 상실을 만남으로 이겨냈다. 절망도 행복으로 덧칠해 끌어안았다. 그는 그저 상실일 뿐이었기에.
그렇다면 지금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눈물젖은 성마름이 고통을 토해냈다. 소녀는 그의 행복했던 유년기를 모조리 박살내버린 흑마법사를 증오했다. 고상하게 포장해보았자 결국 시작의 마음은 흑마법을 향한 분노였다. 납득와 용납은 달랐다. 존재를 납득했으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타인을 상처입할 수밖에 없는 마법을 선택한 자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은 다 헛말이었다. 이제껏 지나온 수많은 흑마법사들 중 사정 없는 사람이 더 드물 터. 지키기 위해 검 하나를 빼들어도 잘못 발 내딛으면 살인자가 되기 마련인데, 심지어 이성까지 갉아먹는 흑마법이라면 어떻겠는가. 완전히 무너진 신뢰는 그를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수도 없었다. 아니, 사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친구들에 대한 믿음은 틈 하나로 재가 되어 버렸기에. 여전히 속을 가득 적시는 달콤하고 따뜻한 코코아같은 애정과 별개로......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빛 아래 신의 검 한 자루가 되기로 결심했던 소녀는,
"어째서...... 어째서에요!"
소녀가 땅을 내리쳤다. 무기를 잡아 형편없이 굳은살 박힌 손이 돌에 긁히고 모래에 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녀는 소리쳤다.
"내가 어째서...... 내가 어째서 기사가 되었는데!"
중앙 신전은 사람을 돕는다. 집을 잃은 사람에게 잘 곳을 주고, 배 곪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 의료봉사를 제공한다. 신전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자애를 배푸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신전의 검, 신의 검. 신전기사는 외압을 배제하고 전란에서 싸웠다.
그래...... 신전기사는 집을 빼앗고 먹을 것을 빼앗고 사람을 상처입히는 존재와 싸우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하리오티는 신전기사가 되었다. 제 소중한 사람들 모두를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을 것이라 믿었기에.
"어째서 성전까지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신전의 개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길을 골랐는데!"
그렇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괴로웠으나 견딜 수 있었다. 그 생명의 무게를 자신이 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정당화 할 수 없었으면 끌어안기로 했다. 늘상 기도하는 것은 그녀가 죽인 생명의 평온이었다. 상대가 흑마법사였어도, 신전이 죽어 마땅하노라 판단한 자였어도. 그래도 그 무게만큼은 그녀의 어깨 위에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씩 적응했다. 호흡법을 배웠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데 어째서!"
그 검 끝에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 폐부를 찔렀다. 가장 증오하는 것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어째서에요, 어째서...... 왜...... 왜에요. 어째서....... 나는, 나는......"
대지를 쥐어뜯으며 소녀는 땅을 적셨다. 황야의 늑대를 씹어 삼키면 제 감정도 재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제 마법으로 머리를 마비시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갈라진 목에서 짐승 비슷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손에서 끈적끈적한 피가 묻어나왔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흐릿한 시야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녀는 상처입은 짐승마냥 울었다.
"나는......."
사랑을 끌어안고 검을 내리쳐야 하는가? 아니면 제 감정 귀한 것 알기에 그러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서 웃어줘야 하는가? 하리오티는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마얀 하나 있을 적엔, 그래. 대화로 납득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둘, 셋, 그리고 넷이 되니 이젠 그조차 부질없었다. 모두 흑마법사이거늘 어찌 경중을 나눈단 말인가. 비웃음만 나올 말이었다. 그들에게 주는 감정의 경중과 별개로 대하는 태도만큼은 같아야 옳았다.
세상 모든 흑마법사에게 망설임없이 단죄의 검을 들이밀 자신이 있었거늘 이곳에서 망설이는 제 자신에게 환멸이 나왔다. 헛웃음이 터졌다. 허나 인간이기에 하리오티는 망설였다. 억지로 납득하려했고, 납득하려는 모습에 또 실망했다. 뱃속에서 솟구친 자기혐오가 언어가 되지 못하고 토악질에 섞여 흘렀다.
"아아아...... 아아아아......"
흐으으...... 갓난쟁이처럼 웅크리며, 소녀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용암처럼 흘러내려 소녀의 머리 위에 쏟아진 무언가가 소녀를 완전히 불태워, 그 안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때까지, 그렇게 오래.
공미포 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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