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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9.02.16 사파이어와 오팔과 숯과 약초
  5. 2019.02.14 골렘과 대련
  6. 2019.02.09 어느 날
  7. 2019.02.08 꿈에서 만난 사슴
  8. 2019.02.06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납화살

2019. 2. 20. 01:03 from Fantasy/Harioti Lop

https://youtu.be/y_q6sF95lJc






 흑마법사가 넷.......


 숨을 이어갈 기력조차도 모조리 빼앗긴 소녀는 죽은 가지처럼 가만히 서서 바닥을 응시했다. 텅 빈 봄꽃색 눈동자는 세상을 흐릿하게 비췄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 다음에는 눈물이 났다. 하염없이 울고 나니 끝도 없는 절망에 빠진 듯 우울했으며....... 끝내 소녀는 무기력해졌다. 눈물을 흘릴 힘도 없었다. 못 볼 꼴이 되어 형편없어진 얼굴로 소녀는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말라비틀어진 꽃송이 하나가 소녀의 어깨를 대신 적시고 떨어졌다. 귀에 멀리서 들리는 이명이 들렸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어린시절부터 쌓아 온 우정을 기반으로 견고하게 쌓았던 신뢰가 발끝까지 모조리 무너지는 감각에 소녀는 숨을 삼켰다. 목이 졸리는 것보다 괴로웠다. 정말로 사랑했고......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태엽 하나가 망가져도 완전히 못쓰게 되어버릴 정도로 연약한 신뢰가 아니었기에 소녀는 그것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노랫소리게 끊어지는 잡음이 섞여도 아름답게 들을 수 있었기에 그랬다. 좋아했으니까. 정말 많이 좋아했으니까. 완전히 망가져 산산조각나 저를 찌르는 순간까지도.


 붙잡고 있던 손, 끌어안고 있던 몸뚱아리 전부에 상처를 입고, 소녀는 피 흐르는 무언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방치하기로 했다. 뿌옇게 세상을 비추는 연두색 눈동자에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도무지 정할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혼란만 그저 소녀의 안에 푹 고여 있었다. 


 몽몽...... 몽몽. 그녀의 작은 새. 그녀의 가족이자 첫 번째 벗이자 형제였던 몽몽이 보고 싶었다. 가지에 장식했던 장신구를 생명줄처럼 손에 부여잡고 소녀는 가쁘게 숨을 뱉었다. 소녀가 무엇을 선택하던, 어떤 길을 걷던 다정하게 울음소리를 내 주던 그가 보고 싶었다. 뺨에 달라붙어 온기를 나눠주던 몽몽이 보고 싶었다. 모조리 무너진 신뢰 속에 망자를 붙잡고 소녀는 다시 울었다. 이미 형편없는 얼굴에 다시 눈물이 길을 열었다. 


"보고싶어...... 보고싶어."


 괴로워...... 나 힘들어, 몽몽....... 숨이 막혔다. 꺽꺽 소리내며 소녀는 땅에 엎드려 오열했다. 믿음을 배신하고 신뢰를 뿌리치고 흑마법사의 손을 잡은 벗들의 존재가 괴로웠다. 그들에게 제 신뢰 한 조각, 믿음 한 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몰랐겠지만. 이는 그저 소녀의 이기심에 가깝겠지만...... 그들에게도 각자의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허나 그 선택을 이해하고 납득해주기에, 소녀는 충분히 한계였다. 


 방학이 시작하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급하게 이사를 가야 했다. 이웃들을 모조리 두고 가족들의 손에 이끌린 이사였다. 그 마을은 흑마법사에게 점령되어 이제는 생존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소녀의 첫 번째 상실은 그토록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그리고 3년이 조금 넘었을 때 가족들이 죽었다.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흑마법사와의 전투 끝에 죽어 돌아왔다. 전사통지서와 팔 하나, 손가락 하나, 뼛조각 몇 개. 관에 넣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두 번째 상실은 내장을 모조리 헤집어 갈기갈기 찢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 모든 것을 견뎌냈다. 남은 가족을 끌어안고, 새 가족을 들이고,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일상을 보내고, 먼 곳의 친구에게 연락해서 이웃에게 그러는 것처럼, 소소한 대화를 하고....... 상실을 만남으로 이겨냈다. 절망도 행복으로 덧칠해 끌어안았다. 그는 그저 상실일 뿐이었기에. 


 그렇다면 지금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눈물젖은 성마름이 고통을 토해냈다. 소녀는 그의 행복했던 유년기를 모조리 박살내버린 흑마법사를 증오했다. 고상하게 포장해보았자 결국 시작의 마음은 흑마법을 향한 분노였다. 납득와 용납은 달랐다. 존재를 납득했으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 타인을 상처입할 수밖에 없는 마법을 선택한 자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은 다 헛말이었다. 이제껏 지나온 수많은 흑마법사들 중 사정 없는 사람이 더 드물 터. 지키기 위해 검 하나를 빼들어도 잘못 발 내딛으면 살인자가 되기 마련인데, 심지어 이성까지 갉아먹는 흑마법이라면 어떻겠는가. 완전히 무너진 신뢰는 그를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수도 없었다. 아니, 사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친구들에 대한 믿음은 틈 하나로 재가 되어 버렸기에. 여전히 속을 가득 적시는 달콤하고 따뜻한 코코아같은 애정과 별개로......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빛 아래 신의 검 한 자루가 되기로 결심했던 소녀는,




"어째서...... 어째서에요!"


 소녀가 땅을 내리쳤다. 무기를 잡아 형편없이 굳은살 박힌 손이 돌에 긁히고 모래에 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녀는 소리쳤다. 


"내가 어째서...... 내가 어째서 기사가 되었는데!"


 중앙 신전은 사람을 돕는다. 집을 잃은 사람에게 잘 곳을 주고, 배 곪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 의료봉사를 제공한다. 신전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자애를 배푸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신전의 검, 신의 검. 신전기사는 외압을 배제하고 전란에서 싸웠다. 

 그래...... 신전기사는 집을 빼앗고 먹을 것을 빼앗고 사람을 상처입히는 존재와 싸우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하리오티는 신전기사가 되었다. 제 소중한 사람들 모두를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을 것이라 믿었기에. 


"어째서 성전까지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신전의 개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길을 골랐는데!"


 그렇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괴로웠으나 견딜 수 있었다. 그 생명의 무게를 자신이 짊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정당화 할 수 없었으면 끌어안기로 했다. 늘상 기도하는 것은 그녀가 죽인 생명의 평온이었다. 상대가 흑마법사였어도, 신전이 죽어 마땅하노라 판단한 자였어도. 그래도 그 무게만큼은 그녀의 어깨 위에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씩 적응했다. 호흡법을 배웠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데 어째서!"


 그 검 끝에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 현실이 폐부를 찔렀다. 가장 증오하는 것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었다. 


"어째서에요, 어째서...... 왜...... 왜에요. 어째서....... 나는, 나는......"


 대지를 쥐어뜯으며 소녀는 땅을 적셨다. 황야의 늑대를 씹어 삼키면 제 감정도 재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제 마법으로 머리를 마비시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 갈라진 목에서 짐승 비슷한 울부짖음이 흘러나왔다. 손에서 끈적끈적한 피가 묻어나왔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흐릿한 시야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녀는 상처입은 짐승마냥 울었다. 


"나는......."


 사랑을 끌어안고 검을 내리쳐야 하는가? 아니면 제 감정 귀한 것 알기에 그러지 못하고 그저 그 앞에서 웃어줘야 하는가? 하리오티는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마얀 하나 있을 적엔, 그래. 대화로 납득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둘, 셋, 그리고 넷이 되니 이젠 그조차 부질없었다. 모두 흑마법사이거늘 어찌 경중을 나눈단 말인가. 비웃음만 나올 말이었다. 그들에게 주는 감정의 경중과 별개로 대하는 태도만큼은 같아야 옳았다. 

 세상 모든 흑마법사에게 망설임없이 단죄의 검을 들이밀 자신이 있었거늘 이곳에서 망설이는 제 자신에게 환멸이 나왔다. 헛웃음이 터졌다. 허나 인간이기에 하리오티는 망설였다. 억지로 납득하려했고, 납득하려는 모습에 또 실망했다. 뱃속에서 솟구친 자기혐오가 언어가 되지 못하고 토악질에 섞여 흘렀다. 


"아아아...... 아아아아......"


 흐으으...... 갓난쟁이처럼 웅크리며, 소녀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용암처럼 흘러내려 소녀의 머리 위에 쏟아진 무언가가 소녀를 완전히 불태워, 그 안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때까지, 그렇게 오래. 





공미포 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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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 관

2019. 2. 19. 14:05 from Fantasy/Harioti Lop





 소녀는 제 앞에서 사랑스럽게 웃는 소녀를 가만 응시했다. 색 다른 봄색의 눈동자는 기묘한 온기를 담은 그 로즈마리색 눈동자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더듬어 살피는 것처럼 고요한 주시였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그 찰나의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걸음 빠른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아 한 걸음 늦게 분침이 걸음을 옮길 정도의 찰나. 그 얼마 되지 않는 순간동안 소녀는 마치 빛 바래 낡아버린 고목처럼 서서 눈 앞의 물거품같은 소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형에 입맞춰 숨을 불어넣는 것처럼, 말을 시작한 소녀는 그제야 겨우 사람처럼 보였다. 


"......손에 넣어본 일은 없지만, 흑마법이 어떤 마법인지는 잘 알 수 밖에 없지요. 이제껏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이 제게 설명해주고 있으니까요."


 흑마법사에 의해 살고 있던 마을이 점령되어 이웃 대부분을 잃었고, 흑마법사와 대신전기사단의 충돌로 가족 셋을 잃었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굴었는지를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끼고 오열하고 울부짖은 순간이 소녀의 기억 한 구석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그로 인해 시작한 여행의 발자취 어딘가에서는 흑마법사와 직접 대치한 적도 적잖았다. 흑마법사의 몸이 눈앞에서 터지는 꼴도, 흑마법사가 이성따윈 밤하늘 빛 한 점 조차도 없는 것처럼 구는 모양새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흑마법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에코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저도 알아요. 그 말처럼, 흑마법과 칼은 유사할지도 모르지요."


 저도 날붙이를 쥐고 사람을 찌른 적 있었고, 기사로, 전사로 살아가며 무언가를 베고 찌르고 쏘아 떨어트린 적이 적잖았다. 사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위험성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은 안다. 사용하는 사람이 그녀의 벗이라면...... 어쩌면...... 소녀 역시도 어찌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 뇌리를 모조리 점령하고 갉아먹고 있는 것이 그 알량한 희망이지 않던가. 하리오티는 가만 눈을 내리깔았다. 긴 제비꽃 색 속눈썹이 우울하게 음영을 드리웠다. 소녀의 기초 근본 어딘가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격랑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삶을 살아오며 쌓아 온 도덕심, 소중한 이를 향한 애정, 그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기사로써 가져 온 정의에 가까운 마음가짐까지도 모조리. 

 세상 모든 흑마법사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들은 끝내 타인을 향한 공격성과 잔혹함으로 그들의 위험성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소녀의 의무는 검을 들고 그들을 단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기사였기에.

 그렇다면 소녀의 소중한 이라고 해도 어찌 그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애정은 예외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유가 어쨌건 흑마법은 결국 사람의 이성을 갉아먹고 끝내 파멸로 사람을 이끌 터인데. 처음부터 위험한 칼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으나 뒤에서 찔러오는 칼 중 위험한 것은 단연코 후자였다. 흑마법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는 신뢰는 이미 쩍쩍 금이 가 갈라져 무너졌다. 결코 그 신뢰는 다시 세워질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마얀은 자신이 최소의 선을 넘지 않았음을 소녀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그게 소녀가 가까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절벽 끝의 선이었다. 소녀가 눈을 떴다. 오후의 빛을 받아 빛나는 양 쪽의 눈동자는 쏘아진 화살처럼 흔들림없이 날카로웠다. 


"모든 결론은 마얀 본인과 대화를 해 봐야 내릴 수 있는 거겠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에코. 하지만 에코와 모두가 상냥하게 군다고 해도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선 바깥에 마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애정이 소녀의 심장을 찌르고 비통의 눈물을 흘린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가족들이 자신을 잊은 지금 널 기억하는 가족은 마얀 하나뿐이거늘 그래도 괜찮느냐 소리치는 마음의 소리에 하리오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 말할 수 있었다. 고지식하며 낡았노라 손가락질 받는 한이 있어도 그랬다. 검을 처음 든 이유는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으나, 그녀는 지금 죄없는 사람들을 지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수호하는 검이다. 생명의 경중을 어찌 감히 제 감정으로 제단할 수 있을까. 


"에코 덕분에 조금 생각은 정리되는 기분이네요. 고마워요."


 그렇기에 하리오티는 웃었다. 눈앞의 소녀를 향한 애정과 감사를 담아 짓는 작은 미소였다. 진주빛 뺨에 흐릿한 온기가 돌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이 괴로울 것임을 알았지만, 소녀는 가시밭길에 기꺼이 발을 딛을 준비를 했다. 오늘의 전투가 끝난다면, 결론이 날 터였으니.  






공미포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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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2. 18. 01:21 from Fantasy/Harioti L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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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해버리면 주는 입장인 내가 김이 새버리는데."

"엩."


 첸의 말은 분명히 알 수 있는 농조였지만, 소녀는 순간 굳어 눈을 데굴 굴렸다. 그런가? 하지만 진짜였는데. 첸이 그럴 리 없겠지만 길에서 주워 온 나뭇가지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럴 터이고. 애초에 선물의 만족도는 사실 물건보다는 주는 사람이 중요한 법 아니던가. 소녀가 남동생인 하람이 못나게 만든 쿠키로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릴 수 있는 것과 꼭 같은 이치였다. 살짝 곤란한 빛을 띈 개나리같은 눈이 잠시 허공 어딘가를 애매하게 응시했다. 하리오티의 고민을 적당히 읽어낸 첸이 금방 말을 이어 다른 대화로 이끌었기에 둘의 주제는 금새 변했다. 말을 이을 때마다 소녀의 표정은 솜사탕처럼 금새 변했다. 붉어졌다가 다시 희어졌다가, 삐죽거리기도 하고 새침한 듯 하다가 웃기도 하였다. 참으로 즉각적인 변화였다. 


".......숨기느라 버럭하는 건, 조금 아까우니까. 첸이 나한테 충분히 소중한 것도... 사실이고."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서 다행이야. 음......"


 첸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어 물었다. 


"난 너한테 해준 것도 얼마 없는데?"
"응?"


 그 말에 하리오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하리오티는 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봄꽃의 색을 한가득 담은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바다의 소년이 가만 담겼다. 소녀는 도리어 그러한 말을 들은 게 어색하는 표정이었다. 해 준 게 없다니? 6년 전 학당에서 친구(가 되었다고, 소녀 혼자 생각하는 것일지라도)가 된 이후로 좋으나 싫으나 첸은 6년이나 하리오티와 연락을 주고받아주었다. 중간에 연락이 끊기거나 채 편지 한 통 주고받지 못한 친구들도 한둘이 아닌 입장인 소녀에게 첸의 존재는 저가 학당에서 보낸 1년이 제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소녀의 고개가 기우뚱하게 기울어졌다. 긴 머리카락과 가지에 매달린 꽃이 소녀의 움직임에 맞춰 살짝 고개를 틀었다. 더군다나 어인 아이와 가족이 된 이후로 더더욱 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폐쇄적인 어인들의 생활방식이나 그에 맞는 약재나 음식 따위를 인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어른 인간과 갓 어른이 된 드라이어드가 알 리 없었다. 하람이 아프지 않고, 아프더라도 금방 털고 일어나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건 첸 덕분이었다. 하리오티는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받은 게 너무 많은데? 하리오티는 진심으로 의아해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또 기웃했다. 소녀의 표정이 묘하게 새치름해졌다. 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전제부터가 조금 잘못되지 않았는가. 


"해 준 거랑 소중한 거랑은 관계 없잖아?"


 그래, 이것. 소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나는 첸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도대체 뭘 해준 게 없다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만약에, 실제로 해 준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해도 사람이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데에 그건 크게 관계 없어."


 소녀는 도리어 기쁘게 웃었다. 6년을 성장하여 솔직하게 미소지을 수 있게 된 소녀는 망설임없이 소년의 앞에서 웃어보았다. 꼭 제 종족처럼 꽃이라도 피어나는 듯 한 미소였다. 준 사람은 자신이 준 것의 가치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받은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큰 것일 수 있었다. 소녀에게 있어서 학당의 친구들의 존재는 모두 그러했고, 그 중 유독 특별한 몇몇 중 하나에 속하는 사람이 준 것이 없노라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즐겁기도 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어 기사가 된 소녀가 아니던가. 물론 네 존재가 저에게 이토록 무게 있노라 말하는 것은 어쩐지 부끄러워서, 많이 성장했으나 여전히 수줍음타는 소녀는 그 말까지는 삼켰다. 더군다나 이것까지는 꽤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거기다가 상대에게 있어서 자신이 같은 무게로 중요한지, 소중한지, 가치 있는지...... 하리오티에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저가 소중히 여기면 되었으니까. 자기 자신도, 상대도.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는건지, 지나치게 겸손한건지. 사실 첸은 자기 얘기를 잘 안 해서 나는 정확한 건 잘 모르지만......"


 몇 걸음 더 가까이 걸어온 소녀가 한숨 비슷한 것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소녀의 자세는 누가 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제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문득 스쳤다. 견습 기사가 된 이후로 몇 십 번, 몇 백 번이고 연습했던 동작이었다. 상대의 손을 들어올리고 허리를 우아하게 숙여서 손등에 입맞추는 가벼운 인사. 상대에게 바치는 존경과 헌신. 물론 장난도 과하면 안 될 터이니 그저 손등에 대는 시늉만 했다가 허리를 펴며 하리오티가 씩 눈을 휘었다. 


"첸은 충분히 특별하니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의미로 이거 받아! 곧장 가볍게 몇 걸음 떨어진 소녀가 냉큼 그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선물의 이야기가 나온 뒤로 이런저런 고민을 해 보았지만, 역시 제일 주는 게 좋겠다 생각한 것은 이것이었다. 사파이어와 오팔의 보석결정으로 기반으로 만들어져 에르바와 숯의 마력을 사용하여 만든 둥그스름한 거울. 빛의 거울이었다. 

 소년의 손에 거울을 넘겨준 소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걸 받은 소년이 어찌 반응할지, 사실은 잘 모르겠으나....... 소녀는 소년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별개로, 유감스럽지만, 소년에 대해 정확히 잘 몰랐고. 하지만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낸다거나 업보가 쌓여 신관 님께 안 좋은 말을 듣거나 하는 것은 알았다. 가끔은 어쩐지 조급하거나 절박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보잘것없는 넘겨짚기라고 생각하며, 하리오티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중한 만큼 걱정이었고 그만큼 믿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저 보잘것없는 염려였다.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보고, 현재가 조금이나마 더 즐거워진다면 좋겠네."


 알고 있겠지만, 행복한 시점의 미래를 보여주는 거울이니까... 언제든지 써도 좋지만, 특히 나중에 힘들 때가 온다면 한 번 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소녀가 그리 덧붙이며 느긋하게 소년을 응시했다. 





공미포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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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골렘과 대련

2019. 2. 14. 03:25 from Fantasy/Harioti Lop




"그! 그럼, 잘 부탁해요."

"싸우는 건 하리오티인걸요."

"봐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어요."


 하리오티가 수줍게 웃었다. 햇빛 아래 밀밭같은 색 고운 머리카락을 가진 학당의 벗은 한 번 고개를 기울였다가 얌전히 끄덕이고는, 그녀의 대련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멀찍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하리오티는 몇 번이고 해나가 안전한 곳에 있는지, 혹시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을지 몇 번이고 염려하여 해나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았다. 제 바로 앞에 서 있는 집채만한 골렘에게는 별 걱정도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해나의 안전을 느즈막히 확신한 뒤에야 하리오티는 골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았다. 새벽부터 생일인 걸 들켰고─안 말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하리오티는 사르힌을 새삼 신기하게 생각했다.─덕분에 선물과 축하를 잔뜩 받았다. 오늘은 소녀에게 있어서 제일 행복한 날 중 하나였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축하한다 이야기 듣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렇기에 소녀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마저 떠오른 상태였다. 6년 전 이 학당에서 방학을 맞은 그 순간부터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훈련을 받았다. 아티팩트로 시작한 궁술부터 시작하여 창술, 검술, 간단한 호신술까지. 온갖 것들을 철저하게 배운 뒤에는 2년동안 여행을 다니며 온갖 것들과 대응하는 법을 배웠다. 떠돌아다니는 흑마법사,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 상상하지도 못했던 각종 사고들. 소녀는 약점을 노리는 방법과 가장 합리적으로 싸우는 요령을 익혔다. 이 2년은 센스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1년은 기사단의 견습으로 머물며 또다시 수련. 소녀의 6년은 강철을 두드리는 것처럼 힘겨웠으나 망치질을 제대로 견뎌낸 소녀는 이미 숨쉬듯 전투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골렘의 주먹질을 점프 한 번으로 피해 가볍게 바윗덩이의 머리 위에 내려앉으며 소녀는 검을 뽑았다. 가장 자신있는 것은 활이었으나, 이정도로 가깝게 거리가 좁혀진다면 소녀는 활보다는 다른 방식을 골랐다. 아티팩트를 둔기처럼 사용하던 것은 6년 전의 이야기. 익숙해지기만 하다면 둔기보다는 날붙이 쪽이 확실했다. 노랗고 녹빛의 색 다른 눈동자가 예리하게 벼려졌다. 


 오른쪽 팔, 왼쪽으로 이어져서 위로, 다음은 내리찍기. 골렘의 전투방식은 생각하며 움직이는 몬스터나 흑마법사에 비해 몹시 단조로웠다. 물론 몸체가 어지간한 몬스터보다도 단단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연결부가 뚜렷하고 입력된 방식으로만 움직인다는 점에서 골렘은 그다지 그녀의 적수가 아니었다. 물론 감정이 없어서 신성마법이 통하지 않기에 사하라의 살라만드라같은 강력한 골렘이 상대라면 조금 곤란해지겠지만...... 그런 골렘이 흔한 것도 아니고요.

 한 대 맞기만 하면 장정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녔지만, 소녀는 그다지 동요하지도 않는 얼굴로 우아하게 그것들을 피했다. 각도나 공격궤도상 피하기 곤란한 공격은 검으로 받아 빗겨냈다. 소녀의 검은 비교적 얇지만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잘 휘어졌고, 꽤 길었다. 부족한 건 근력과 센스로 보충했다. 가느다란 팔과 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으로 소녀는 골렘의 힘을 받아 흘려내며 그 팔 위로 올라탔다. 

 골렘은 무엇보다 약점이 뚜렷한 물체였기에, 하리오티는 별 망설임도 없이 팔을 타고 올라가 약속의 말의 양피지가 들어있을 머리를 검으로 베어 날려버렸다. 양피지가 찢기자마자 골렘은 곧장 기동을 멈췄다. 


 앗, 맞다. 이건 대련이었는데...... 그제서야 조금 상식적인 방향으로 이성을 되찾은 하리오티가 골렘의 위해서 폴짝 뛰어내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행동불능만 시키면 되었는데, 곤란하게 되었네요. 살짝 쩔쩔매던 소녀는 고개를 돌려 해나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곧장 조금 수줍게 미소지었다. 해나가 보아주어 마냥 기쁘다는 미소였다. 방금 전까지 차분한 표정으로 골렘의 머리를 날리던 기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수줍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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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어느 날

2019. 2. 9. 23:57 from Fantasy/Harioti Lop







 분명히...... 그녀는 제 어린 동생의 손을 이끌고 문을 열었다. 하리, 하람. 좋은 아침. 다정하게 인사해주는 아버지의 인삿말을 받으며 그녀는 하람을 번쩍 들어올려 자리에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빠. 소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빈 자리로 향했다.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소녀는 속으로 인사했다. 빈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흑마법사의 선전포고 이후 곧장 복직한 어머니와 원래부터 현직이던 두 언니오빠는 모두 신전기사였다. 본래 살던 마을은 그들이 동쪽의 대신전 바로 근처 마을로 이사한 직후 흑마법사에게 점령되었고, 그곳에서 산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대신전의 기사단과 흑마법사는 3일간의 전면전을 치뤘다. 하리오티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연약한 아버지와 이웃들을 보호하며,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그저 기도하는 것밖에는. 누스 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기다림 끝에 날아온 건 세 장의 전사 통지서였다. 


 그 때보다 더 비참했던 때도 없지...... 그녀는 턱을 괴고 아버지가 동생에게 이것저것 먹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은 따뜻한것이 날씨도 좋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하리오티도 저 곁에 앉아서 호들갑을 떨며 하람을 귀여워해주었겠지만, 날씨에 비해 묘하게 생각이 축축 가라앉았다. 하람에게는 악몽 아니라고 했지만, 악몽에 가까운 건가? 루케루카 시절의 꿈이면 좋긴 하지만...... 그녀는 머리카락을 불어 쓸어넘기고는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을 잃은 소녀가 뭘 할 수 있을까. 한참을 힘겨워하던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여 집을 떠나 여행을 시작했다. 떠난 가족들이 남긴 흔적을 보는 게 힘들었다.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다시 돌아 동쪽으로 되돌아오는 긴 여행이었다. 아버지와 둘이서 시작한 여행이었으나,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동생이라는 새 가족까지 생겼다.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것을 괴로워하며...... 소녀는 성인이 되었고 조금 더 자랐다. 그렇기에 꿈에서 던져졌던 과거의 질문에 똑같이 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는 건 두렵지 않아. 누군가에게 소중히 여겨지는 것도 두렵지 않아.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모든 긍지를 짊어졌겠지만, 분명 집에 있을 나랑 아빠를 사랑해서 지키기 위해 싸워주었어.


"하람."

"응, 누나!"


 팔을 뻗자 아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왔다. 그녀의 신호를 보자마자 그대로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막내를 벗어난 그녀는 품에 안긴 하람을 한참을 더 보듬었다. 잃었어도 그 때의 행복이 나를 지탱해주고, 나를 또다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줘...... 소녀가 동생에게 뺨을 부볐다. 꺄르륵 웃는 하람의 웃음소리에 하리오티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그러니 새롭게 소중한 것을 만드는 것도 무섭지 않아. 어인 동생의 뺨에 입을 맞추며 하리오티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다음엔 내가 사랑해주고, 또 내가 지킬 차례니까.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하리오티가 아버지에게 스푼을 건내받아 하람의 입에 음식을 넘겨주었다. 잘 먹네, 우리 하람. 아이를 귀여워하는 애정 넘치는 목소리가 소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꼭 어린 시절 보았던 언니오빠처럼. 





공미포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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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물빛의 사슴은 그 공간에 앉아있었다. 사슴에 기대어 눈을 뜬 소녀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사슴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 만나는 수호천사는 예전보다는 조금 더 우아하고 고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짙푸른 색 눈동자는 걱정으로 일렁이거 있어서, 여전히 조금 주책이고 울보인 천사 그대로구나 싶었다. 다른 분들 천사는 믿음직스럽고 멋진 것 같던데, 정말이지. 마음 쓸 수밖에 없는 천사였다. 손을 뻗어 사슴의 목을 끌어안으며 하리는 그제야 정식으로 수호천사와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와 줄 줄은... 몰랐어, 하리."

"왜요?"

"나를...... 안 좋아했잖아."


 아주 오래. 아주아주...... 오래. 천사의 속삭임에 하리가 잠시 침묵했다. 사슴의 목을 쓰다듬는 손길은 여전히 느리고 규칙적이었지만, 말이 없는 소녀를 천사는 가만 응시했다. 하리? 소녀는 저에게 묵직하게 닿는 천사의 무게라던가, 온기 따위를 침묵으로 삼켰다. 물론 이는 꿈이고, 천사와는 닿을 수 없는 것이 정석. 그러나 꿈속에서만큼은 이것이 현실이기에, 소녀는 별 거리낌없이 천사를 토닥이고 다시 앞을 보았다. 기대오는 하리오티를 천사는 사양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그랬죠."

"우우......"

"하지만 나도 알아요. 당신은 내게 각인을 주고 마법을 주고 나를 살려줬어."


 갓 운석에서 깨어나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소녀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소녀의 운석이 떨어져 소녀가 깨어난 장소는 야생동물도 잘 살지 않는 곳이었고, 인간도 드물게 다녔다. 지금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를 주워준 것은 수호천사의 힘이었다. 감정을 피어나게 만드는 힘. 어쩐지 이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묘한 직감. 어쩌면 간절한 부름. 소녀의 어머니는 강인한 신성기사였고, 아직 아기인 소녀를 살리기 위해 조금 내려온 수호천사의 힘은 강력한 것도 아니었어서 저항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다행히 천사가 내린 직감을 받아주었다. 직감 끝에 도달한 곳에서 울던 아기를 끌어안았다. 하리오티가 지금의 가족들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천사의 덕분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다면 그에게 감사할 일 뿐이었다. 하리오티는 지금의 가족들을 사랑했고,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다섯 살 소녀가 드라이어드 사냥꾼에게 보쌈당할 뻔한 일. 당연히 소녀의 곁에는 형제들이 있었고, 미수였고, 하리오티 본인은 납치는 커녕 잠시 누군가에게 잡혔다가 정신차리니 다시 언니 품에 안겨있었다 정도의 소감밖에 없었던 일이었으나 그걸 어마어마하게 크게 인식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첫째는 가족. 둘째는 그녀의 걱정 많은 수호천사. 소녀의 사소한 불행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드라이어드의 특성상 낯가림이 심하고 경계심 강한 소녀는 알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도 없이 집에서 꽁꽁 틀어박혀 가족에게나 겨우 마음을 열어주던 시기였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소녀의 걱정 많은 수호천사는 소녀가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슬쩍슬쩍 힘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도로에서 마차에 한 번 치인 소녀가 도로를 건널 때마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천사는 상대의 마음에 호감을 심어주었다. 가족에게 보내는 것 같은 호의. 상대가 위험한 사람이어도 소녀만큼은 위험하지 않도록. 아주 작은 씨앗이었지만 분명하게. 신성기사인 소녀의 가족들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걱정했고 안심했다. 마법의 조절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걱정했지만 동시에 소녀의 안전을 그토록이나 신경쓰는 수호천사에게 안심했다. 


 하리오티는, 복잡했다. 저를 걱정하는 것을 알아도 마법에 대해 정확히 인지한 다음부터는 천사의 걱정에서도 벗어나고 상대를 수호천사의 마법에서도 벗어나게 할 수 있도록 자의로 다시 집에 처박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집 주변, 소녀가 아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곳의 산책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족 중 누구 한 명의 손을 잡고 뒷산에 올라가 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빛 받으며 낮잠 자는 게 제일 행복했다. 낯선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어도, 수호천사가 먼저 힘을 쓸까 염려되어 손도 내밀 수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상대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천성이 고집 세고 선하며 정의로웠던 소녀는 자신의 마법을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언니오빠와의 합의 하에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본 결과 자신의 마법의 한계를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랬다. 나는 누군가와 나 자신으로 만나보고 싶어요. 수호천사의 걱정에 휩쌓여 마법을 사용받는 것 말고 일 대 일로요. 그러니 당신이 나를 그만 걱정하게 될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려주겠어요. 하늘을 노려보며 제 천사에게 선언한 나이가 일곱. 그 뒤로 소녀는 제 마법을 꽁꽁 숨겼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천사도 주책을 부리지 않았으니 늘 다니는 행동패턴만 지키면 괜찮았다. 소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제 꽃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을 가지기도 했다. 좋은 향기인데, 하고. 


  소녀가 자라며 수호천사의 걱정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열 세 살이 될 즈음에는 낯선 사람을 보아도 걱정은 할 지언정 꾹 참고 지켜볼 정도의 인내도 생긴 것 같았다. 덕분에 소녀는 천사에게 쓸 데 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날아오듯 루케루카로 올 수 있었다. 엄마며 아빠며 두 언니오빠들도 걱정 역시도 태산같았지만 괜찮다며 밀어붙였다. 루케루카에 대해 알려주고 제의한 건 정작 본인들이면서, 소녀가 떠난다는 것을 걱정해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물론 소녀 역시도 무섭긴 했다. 천사든 가족이든 누군가의 보호 없이 사람의 앞에 혼자 서는 건,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겁과 긴장으로 내심 얼어 있던 소녀를 사르르 녹인 건 제 또래 친구들의 온기였다. 



 친구가 되자며 손을 뻗어준 유라도, 룸메이트로써 늘 다정한 디케이아와 누아도, 천사가 되겠다며 끌어안아 준 아일도, 에코, 블루밍, 돌로레스...... 그리고 루케루카의 상냥한 친구들을 만나 소녀는 행복했다. 마법이 없어도 제대로 타인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가족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친구들이 나를 믿어준다. 그 확신 하나로 소녀는 제대로 견고해졌다. 사랑받고 자라 사랑을 확신한 소녀는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멋진 꽃이 되었다. 등나무꽃 소녀의 가지에 잎눈이 맺히고 잎이 퍼졌다. 꿈이기에 가능한 급속한 성장이 소녀의 행복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푸르스름한 꽃나무가 되어 소녀는 행복하게 웃었다. 발간 뺨이며 한껏 휘어진 눈매와 입가가. 즐거워보이는 표정이...... 그녀의 천사가 원하던 하리의 모습 꼭 그대로라서, 


"고마워요, 내 천사님. 덕분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

"하리......"

"난 더 강해질거에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검이 되고 싶고 방패가 되고 싶으니까."

"하리이......"

"아주 열심히 할 거에요! 뭐든지요. 신께서 내려주신 삶을 정말로 즐겁게 살고 싶어요."

"흑, 하리......"

"내 마법도 조금 더 아끼고 연습할테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계속 날 지켜줄거죠? 소녀의 속삭임에 사슴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소녀의 반짝반짝 빛나던 개나리색 눈동자가 눈앞에 선연했다. 오래 사랑했던 소녀의 강인함을 정면에서 지켜본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소녀는 꿈에도 모르리라. 잔뜩 젖었던 눈은 벌써 애저녁부터 뚝뚝 눈물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응. 천사가 속삭였다. 물빛의 사슴은 머리를 소녀의 품에 묻고 작게 속삭였다.

 응...... 내가 언제나 너를 지켜볼거야. 









공미포 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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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다녀왔습니다."

"그래. 헤리 왔니."


 다녀왔다는 깔끔한 인사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헬리오스는 그 익숙한 반응을 심드렁하게 넘기고 느긋하게 집을 살폈다. 벌써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으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무튼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귀염둥이 막내가 중앙으로 공부하러 가 버린 지도 벌써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였다. 평소였다면 헬리오스 역시도 이 분위기에 동화되어 방에 가서 쓸쓸하게 하리가 준 선물들을 살피거나 간식이나 입에 넣거나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헬리오스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도저히 지우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후후 웃고 있는 헤리오스를 이상하게 본 건 그의 쌍둥이 누이였다. 


"뭐야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왜이래?"
"셀레네.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될 텐데~?"

"뭐래. 진짜 잘못 먹었네."


 엄마 또 헬리오스한테 뭐 먹인 거 아냐? 안 먹였고 안 했어 이 지지배야!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보는 두 모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후후 음흉하게 웃던 헬리오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편지봉투. 직감적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만, 경이로운 시력으로 편지봉투 위에 또박또박 적힌 하리오티 롭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두 사람이 곧장 손을 뻗었다. 내놔, 우리 하리 편지! 먹이를 잡아채는 매보다도 용맹하게 편지를 노리는 두 모녀 사이에서 날렵하게 빠져나요며, 헬리오스가 편지를 뜯었다. 여전히 손은 헬리오스를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날아왔지만, 평범하게 빼앗길쏘랴. 이 무슨 아쉬운 말씀. 내가 이걸 왜 고이 들고 왔는데. 캬, 나 진짜 착하다. 먼저 안 뜯어보고 같이 보고. 저 홀로 추임새를 넣으며 두툼한 편지를 펼친 헬리오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편지의 서두가 시작되자, 모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얼른 뒷부분을 읽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요리를 하던 아버지마저도 하던 것을 급히 정리하고 다가오는 모양새에, 헬리오스도 얌전히 뒷부분으로 눈을 옮겼다. 저 역시도 내용이 궁금한건 매한가지였다. 


"안녕하세요, 하리오티에요. 잘 지내고 있나요? 가족들은 모두 건강한가요? 저는 건강합니다."

"내새끼 건강해서 다행이다만... 우리 연약한 막둥이가 거기까지 가서 몸이라도 상했으면 어떻게 해... 걱정할까봐 저렇게 써 둔 거면 어째?"


 하리오티의 언니 셀레네는 주접을 떨었고 (셀레네는 신전 기사단에서도 말수 적고 과묵한 편에 속하는 무게 있는 신전기사였다.) 가족들은 무언으로 그에 동의했다. 헬리오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문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 와 본 중앙은 아주 신기한 곳이었습니다. 교수님들도 아주 멋지고요. 다른 아이들도 많이 만났어요."

"우리 딸 낯가림도 심한데 잘 지내고 있을까?"


 하리오티의 아버지는 영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수줍음도 타고 부끄러움도 많은데다가 반응이 주로 새침하여 초면에는 까칠하다는 인상을 주는 하리오티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친구를 사귀고 싶어했었다. 제 어린 딸의 수줍은 희망사항을 알고 있던 아비는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았다. 


"이곳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방을 함께 쓰고 있어요. 저는 디케이아라는 어인 친구와 누아라는 드라이어드 친구와 함께 방을 쓰고 있습니다. 룸메이트들은 다들 아주 좋은 아이들이에요."

"어인이랑 드라이어드인가. 막둥이는 다 처음 보던가?"
"처음 보지? 이 근처엔 바다도 없으니까... 드라이어드는 원래 좀 귀하고."


 어인이나 드라이어드도 많나? 건너 들은 바로는 드라이어드가 우리 공주님까지 다섯이나 있다던데. 다섯? 진짜 많이 있긴 하구나. 두 쌍둥이 남매가 두런두런 말을 이었다. 지금 대화할 때니? 어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헬리오스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 학당에 왔을 때에는 많이 당황했지만, 지금은 꽤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늘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채집하는 건 정말로 즐겁습니다."

"막둥아 내가 채집 대신 해 줄 수도 있는데!"

"나도."
"하아..."

"주책 말고 얼른 읽어!"


 아 알았어! 헬리오스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가끔은 가족들이 정말 보고싶을 때도 있지만 몽몽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친구들도 꽤 많이 사귀었습니다. 서로를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사람이 생긴 건 정말, 정말, 정말 기쁩니다. 이건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지만요."

"우리 막둥이가 우리가 보고싶대! 비켜봐 난 중앙에 가야겠어! 중앙기사 까짓거 내가 해내고 만다!"

"우리 공주님이 친구를! 으아, 집에 초대하고 싶다! 나도 얼굴 보고 싶어!"

"은퇴 취소하고 복귀하고 싶다...... 당신의 신실한 종을 중앙에 보내주세요 누스 님......"

"자, 다들 정신차리고... 제정신 잡아요 얼른."


 아버지가 온갖 주접을 다 떠는 가족들을 온화하게 붙잡았다. 그런 아버지도 하리의 편지 문장에 마음이 들떠서 들썩거리고 있었으니, 롭 가의 중심은 단연코 하리오티였다. 하리오티가 집에 있었을 때에는 공주님처럼 막내를 보살피느라 늘 정신이 없었고, 소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에는 제 이름이 막둥이 아니면 공주님이라 착각했을 만큼 물고 빨았다. 하기야, 100살이 넘는 나이에 보게 된 어린 딸이나 70이 넘은 나이에 생긴 까마득한 막내가 어찌 귀엽지 않으랴. 하리오티가 가족들 앞에서만큼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마냥 어리광을 피우는 데에는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학당의 친구들은 그런 모습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테니 절대 비밀이었지만) 

 물론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기까지는 꽤 많은 일이 있었고, 어린 하리오티는 제 혼자 맘고생하고 우는 일도 꽤 잦았지만, 지금은 모두 해결되고 롭 가는 견고하고 온전하게 행복했다. 막내가 친구를 원했기에 헬리오스는 루케루카 학당의 이야기를 물어왔고 셀레네는 막내의 입학 가불가 여부를 확인하여 막내에게 학당에 가는 것은 어떻겠냐 물을 정도로 사랑했다. 하리오티를 매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막내의 행복을 위해 학당에 보내준 것은 그들의 사랑법이었다. 등나무 소녀는 그런 가족들 품에서 자랐다. 


"연금술이나 신성마법도 배우고, 흑마법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이것저것 배우는 게 다들 재미있었어요."

"우리 딸은 공부도 잘 하네."

"사실 공부같은거 못 해도 괜찮아.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건 맞아."


 아, 쫌. 내가 읽잖아. 헬리오스가 한 번 투덜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채집을 위해 돌아다니다보면 종종 몬스터를 만나요. 운이 없는 날에는 자주 만난답니다. 특히 저는 사막을 자주 다니는데, 그래서 그런가 사막의 독주를 자주 봐요."

"사막의 독주?"
"그 전갈같은 걔? 나한테야 한주먹거리라지만 우리 하리가?"


 아버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강인한 세 명의 모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그 연약했'던' 막내가 열심히 강해져서 눈의 여왕을 이기기 위해 아티팩트를 휘두르고 다닐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얼굴로 가족들의 표정에 걱정이 번졌다. 


"황야의 늑대 같은 것도 만들면서, 이러니저러니해도 힘내고 있답니다. 다음에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볼 거에요. 집에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을 거에요."

"귀여워라."

"귀여워..."
"우리 막내 귀여워."


 그 뒤로도 편지는 한두문장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추임새가 이어졌다. 두툼한 편지에는 온갖 소녀의 사소한 일상이 즐겁다는 듯한 기색으로 종알종알 적혀 있었다. 돌로레스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거나, 아일이 내 천사님이 되어주었다거나, 첸이 바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는데, 나도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던가, 수영을 배우고 싶어서 숨 참는 연습을 한다거나, 누아는 우리 방에서 유일하게 일찍 잠드는 친구라서 방에 들어가면 늘 자는 얼굴을 본다거나, 디케이아와 함께 별을 구경했다거나. 블루밍과 마얀은 상냥하고 좋은 친구들이고, 블랑은 누아의 쌍둥이인데 아주 고운 색 장미라던가, 그리트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서 같이 피크닉을 갔다는 내용. 유라와 친구가 되어서 말을 놓았고, 사르힌은 아주 얄밉게 굴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그런 소녀의 행복한 일상이 빼곡하게. 

 그렇기에, 어린 소녀를 품에서 떼어놓고 오랫동안 걱정했던 가족들의 표정이 뭉근하게 풀어져 안심할 정도로 즐겁게 쓰여진 일상의 끝무렵을 소녀는 가족들이 만나고 싶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로 마쳤다. 


"잘 지내고 있다면, 정말 다행이네......"


 소녀의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인 편지를 쓸어내리며 소녀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안도해서 웃었다. 소녀는 드라이어드였고, 운석에서 깨어난 아기는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존본능처럼 발현한 마법을 소녀는 내내 경계했지만 동시에 평생을 함께하며 살았다. 소녀가 이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녀로 살아왔던 이유는, 절반이상이 그녀의 사랑스러움이라고 가족들은 믿었지만, 마법의 덕도 역시 없진 않았으리라. 가족들은 하리오티에게 납치나 사냥꾼을 걱정하여 낯선 이에게 늘 조금씩은 쓰라는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소녀가 그 덕분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했다. 


 어쩐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소녀의 활짝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가족들은 집의 어린 막내에 대한 그리움을 삼켰다. 편지에 묻어 온 옅은 등나무 향기가 집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강렬하게 맴도는 느낌이었다. 어린 막내에 대한 그리움에 한숨을 내쉬며, 헬리오스는 편지를 단정하게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곧장 셀레네와 어머니가 편지를 다시 펼쳐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는 모양새를 보며 청년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귀여운 막내야, 이것 봐. 네가 마지막에 끝내 언뜻 비췄던 불안은 이토록이나 불필요한 기우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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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