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관

2019. 2. 19. 14:05 from Fantasy/Harioti Lop





 소녀는 제 앞에서 사랑스럽게 웃는 소녀를 가만 응시했다. 색 다른 봄색의 눈동자는 기묘한 온기를 담은 그 로즈마리색 눈동자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더듬어 살피는 것처럼 고요한 주시였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그 찰나의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걸음 빠른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아 한 걸음 늦게 분침이 걸음을 옮길 정도의 찰나. 그 얼마 되지 않는 순간동안 소녀는 마치 빛 바래 낡아버린 고목처럼 서서 눈 앞의 물거품같은 소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형에 입맞춰 숨을 불어넣는 것처럼, 말을 시작한 소녀는 그제야 겨우 사람처럼 보였다. 


"......손에 넣어본 일은 없지만, 흑마법이 어떤 마법인지는 잘 알 수 밖에 없지요. 이제껏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이 제게 설명해주고 있으니까요."


 흑마법사에 의해 살고 있던 마을이 점령되어 이웃 대부분을 잃었고, 흑마법사와 대신전기사단의 충돌로 가족 셋을 잃었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굴었는지를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끼고 오열하고 울부짖은 순간이 소녀의 기억 한 구석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흔으로 남아있었다. 그로 인해 시작한 여행의 발자취 어딘가에서는 흑마법사와 직접 대치한 적도 적잖았다. 흑마법사의 몸이 눈앞에서 터지는 꼴도, 흑마법사가 이성따윈 밤하늘 빛 한 점 조차도 없는 것처럼 구는 모양새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흑마법의 위험성을 설명했다. 


"에코가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저도 알아요. 그 말처럼, 흑마법과 칼은 유사할지도 모르지요."


 저도 날붙이를 쥐고 사람을 찌른 적 있었고, 기사로, 전사로 살아가며 무언가를 베고 찌르고 쏘아 떨어트린 적이 적잖았다. 사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위험성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은 안다. 사용하는 사람이 그녀의 벗이라면...... 어쩌면...... 소녀 역시도 어찌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 뇌리를 모조리 점령하고 갉아먹고 있는 것이 그 알량한 희망이지 않던가. 하리오티는 가만 눈을 내리깔았다. 긴 제비꽃 색 속눈썹이 우울하게 음영을 드리웠다. 소녀의 기초 근본 어딘가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격랑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삶을 살아오며 쌓아 온 도덕심, 소중한 이를 향한 애정, 그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기사로써 가져 온 정의에 가까운 마음가짐까지도 모조리. 

 세상 모든 흑마법사도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들은 끝내 타인을 향한 공격성과 잔혹함으로 그들의 위험성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소녀의 의무는 검을 들고 그들을 단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기사였기에.

 그렇다면 소녀의 소중한 이라고 해도 어찌 그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애정은 예외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유가 어쨌건 흑마법은 결국 사람의 이성을 갉아먹고 끝내 파멸로 사람을 이끌 터인데. 처음부터 위험한 칼과,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으나 뒤에서 찔러오는 칼 중 위험한 것은 단연코 후자였다. 흑마법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는 신뢰는 이미 쩍쩍 금이 가 갈라져 무너졌다. 결코 그 신뢰는 다시 세워질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마얀은 자신이 최소의 선을 넘지 않았음을 소녀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그게 소녀가 가까스로 납득할 수 있는 절벽 끝의 선이었다. 소녀가 눈을 떴다. 오후의 빛을 받아 빛나는 양 쪽의 눈동자는 쏘아진 화살처럼 흔들림없이 날카로웠다. 


"모든 결론은 마얀 본인과 대화를 해 봐야 내릴 수 있는 거겠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에코. 하지만 에코와 모두가 상냥하게 군다고 해도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선 바깥에 마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애정이 소녀의 심장을 찌르고 비통의 눈물을 흘린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가족들이 자신을 잊은 지금 널 기억하는 가족은 마얀 하나뿐이거늘 그래도 괜찮느냐 소리치는 마음의 소리에 하리오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 말할 수 있었다. 고지식하며 낡았노라 손가락질 받는 한이 있어도 그랬다. 검을 처음 든 이유는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으나, 그녀는 지금 죄없는 사람들을 지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수호하는 검이다. 생명의 경중을 어찌 감히 제 감정으로 제단할 수 있을까. 


"에코 덕분에 조금 생각은 정리되는 기분이네요. 고마워요."


 그렇기에 하리오티는 웃었다. 눈앞의 소녀를 향한 애정과 감사를 담아 짓는 작은 미소였다. 진주빛 뺨에 흐릿한 온기가 돌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이 괴로울 것임을 알았지만, 소녀는 가시밭길에 기꺼이 발을 딛을 준비를 했다. 오늘의 전투가 끝난다면, 결론이 날 터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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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