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의 왕은 피로 길을 닦는다는 은밀한 저잣거리 소문이 돌았다. 정복전쟁이 활발한 시대였다. 전 세계가 제국의 깃발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노라는 광오한 노랫소리가 수도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춤추는 나라. 가장 거대한 땅덩어리의 가장 고귀한 핏줄은 전 세계를 뒤져 딱 넷 있었다. 정확히 논하자면, 윗세대에서 뿌린 씨는 그의 몇 배는 많았으나, 현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한 손가락으로도 쉬이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넷 중 가장 먼저 숨을 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공공연하게 다음 대 황제가 될것이라 추앙받던 첫째. 그러한 첫째가 기꺼이 면류관을 그 머리에 얹어주고 황위를 양도한 둘째. 그리고 그 둘보다 한참은 어려 이제 겨우 제 발로 걸음걸이하며 오라버니 부르는 옹알이나 겨우 하는 어린 쌍둥이 황녀가 둘. 개중 첫째와 어린 황녀는 같은 태에서 태어난 동복형제였으나, 황제가 된 둘째는 아니었다. 넷이 나란히 섰을 때 찬연히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와 홀로 다른 색으로 영롱한 푸른빛은 유독 돋보였다. 그러한 넷의 보기드문 우애는 정교한 연기 혹은 거래로 얻어낸 결과일것이라 암암리에 속삭여지고 있었으나, 역시 뭣모르는 자들이 읊는 뒷소리였으니. 황제가 전쟁으로 수도를 비우고 있는 사이 그러한 소식들을 전해듣는 황형은 얌전히 책상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 혀를 자를까, 말까 하며.
호전성 높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질의 황제는 칼을 뽑고 직접 전장에 나가는 것을 즐겼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있던 일이었다. 부하들만 보내서 얌전히 앉아 세상에 제 것이 되었다면 그게 어디 제 땅입니까. 호기롭게 말하는 아우의 말에 황형은 그저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만 끄덕여주었으니. 황상께서 그리 여기신다면 가시지요. 황상의 빈 옥좌는 제가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황제가 가만 눈을 뜨고 제 황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한 말을 기꺼이 할 정도로 둘 사이에 의심이 없고 신뢰가 있었다. 오롯하게 황제가 될 것처럼 태어난 사내는 놀랍게도 그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 능력은 출중하다 못해 차고 넘치고, 자비심이 없지는 않았으나 잘라낼 때를 놓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제 선 안의 것들을 아껴 그 바깥의 것에게 기꺼이 가차없어질 수도 있었다. 입 밖에 거짓을 내지 않고 제 동생들을 누구보다 귀여워한다는 것을 그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황제가 제일 잘 알았다. 황제가 즉위한 뒤로 황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존대였으나, 황제는 제 형의 목소리가 익숙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네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내가 지원해주마. 걱정 말고 가거라. 여유롭게 빛나는 자수정 색 눈동자를 응시하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 황형만 믿고 저는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나라를 부탁합니다.
우아한 미소와 함께 전장으로 떠나 하루가 다르게 승전보를 보내오는 아우에 지지 않을 정도로 수도에서 황형 역시도 피로 나라의 기반을 새로 닦았다. 반황제파의 목을 치고, 황형의 입장에서는 목까지 치기에 살짝 마음에 걸리는 자들은 아우가 돌아올 적까지는 목을 붙여두며 상세하게 죄명을 적어두고, 암살기도를 기꺼이 벗어나고, 감히 여동생들에게까지 흉수를 두려는 자들은 손발을 자르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흘리는 대신 백성들에게는 퍽 너그럽게 굴었다. 애초에 그는 제 것에게는 너그러웠고, 귀여워하는 동생들에게는 더 너그러웠으니 바로 그 동생의 백성들에게는 자비를 못 베풀 것 하나 없었다. 동생의 것은 흐뭇하게 웃어줄 정도로 귀여웠다. 황제의 길에 꽃을 뿌리고 웃음과 환호와 존경을 외치는 무지한 백성들은 어찌 귀엽지 않을까. 천년제국따위는 관심 없었으나 동생이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지런히 일하는 하얀 손끝에서 수십 수백 수천의 피가 흘렀다가 멎었다가 했으나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하얀 표정에는 거리낌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가 돌아온 날,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그는, 고귀한 자색 옷을 차려입은 황형은 기꺼이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려 황제의 귀환을 기뻐했다. 가지런히 뒤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모습조차 귀해 보일 지경이었다. 심지어 대관식에서조차 무릎꿇지 않을 권리를 거머쥐고 있었던 그다. 가장 고귀한 피. 가장 황제에 가까운 자. 황제의 빈자리에서 황제를 대신하던 자라 암암리에 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자가 그 꼿꼿하던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굽혀 사람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얼마나 충격적인지. 감히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송구스러워 머리를 처박은 신하도 한둘이 아니었다. 어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없이 어수선해지는 공기 속에서 황형은 홀로 미소지었다. 차마 겉으로 티는 못내겠다만 저 신하들 못지 않게─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놀랐을 제 아우의 표정이 눈에 선해서였다.
"언질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편전에서 뒤로 자빠지는 소제의 모습이 그토록 보고 싶으셨나요. 주변에 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보는 낯이 퍽 당혹스러워 황형이 빙긋 미소지었다. 간만에 보는 아우는 여전히 귀엽고, 상처하나 없이 돌아온 게 마냥 보기 좋았다.
"그리하지 않아도 제법 잘 하셨지 않습니까, 황상."
황형의 등 위로 묵직하게 얹어지는 말은 위엄있고 진중했다. 자리를 비웠던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기에 그보다 더 좋은 모습은 없었으리라. 그는 마음 한구석 다 큰 동생을 마주하는 뿌듯함과 아쉬움을 느꼈다만, 아우는 영 아닌 모양이었다. 아찔했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짚는 황제를 보며 황형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직은 조금 더 제 귀여운 아우인가 싶었다.
"그리 노여워마세요. 즐거운 소식도 준비했습니다."
눈끝이 책상 위의 서적으로 흘러갔다. 황형이라는 입장 상 월권 행위가 되어 자신이 목을 치지 못했던 자들의 이름과 죄목을 상세하게 정리해둔 책이었다. 주인 없는 곳간을 노리거나, 주인을 바꿔버릴 시도를 하거나, 그 사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뛰어다니던 자들. 제 황제가 그들마저 깨끗하게 정리해버리면 감히 황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목소리 낼 자들은 아무도 없어지리라.
"잠깐 바쁘겠군요."
"서쪽으로 가기 전까지 소일거리쯤은 있어야 즐겁지 않겠습니까."
황형이 잠시 웃었다. 황제가 정복하고 온 땅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반란분자의 목을 치고, 제국의 법도를 도입하여 완벽하게 제국인으로 만들기까지 과정이 길었다. 제 귀여운 동생이 땅을 정복하고 제국의 깃발 아래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그 밑에서 그곳을 완벽하게 제국의 땅으로 만드는 것은 황형의 일이었다. 동쪽의 끝까지 제국의 것이 되었으니 이제 서쪽 차례였다. 황제야 홀로 완벽했으나 수천수백만의 병사들 하나하나는 인간이었기에 그들이 휴식을 취하고 다시 서쪽의 끝으로 황제의 창이 되어 쏘아지기까지 정비기간 동안 무료할 황제에게 쥐여줄 선물이었다.
팔랑팔랑 살생부를 넘겨보는 황제의 표정이 퍽 즐거워보이는 것을 보며 황형도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 끝무렵에 피비린내가 언뜻 스쳐지나가는 미소였다.
'pokemon > Hwe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 뮤, 세렌) (0) | 2020.08.24 |
---|---|
폭군AU 2 (0) | 2019.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