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국기AU

2019. 10. 15. 14:20 from Fantasy/Titania Summertale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는 별빛을... 얘가 2차를 넘어 3차창작하는군 하고 예쁘게 봐주세요 저를... 참아주세요 (정말 노답같은 발언을 하고 마는데) 

*

 

 

 

 

 

보백 11년, 봉산에서 공과가 깨어나 쿄우키로 칭하다. 

보백 29년, 쿄우키가 수도 금주에서 주를 맞아 서약하니, 그 주 신적에 올라 고왕에 즉위하다. 

그리고 보백 30년, 모란이 첫 꽃잎을 틔우던 계절이 왔다. 

 

 

"타이호!"

 

 일견 다급하게 들리는 여종의 부름에, 청년이 앞서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카락이며 바닥에 끌리는 옷자락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금빛 갈기의 여느 기린보다도 고귀하다던 검은 갈기의 흑기린은 높이 묶어 늘어뜨린 검은 갈기 속 하얀 얼굴이 아름답기로는 한손가락으로 꼽히는 기린이었다. 느른하니 다정한 빛을 띄는 물빛의 시선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깊게 허리숙인 여종은 송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으나, 이어 건내지는 말은 다급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죄송합니다, 타이호. 혹 주상을 뵙지 못하였사옵니까?"

"주상 말입니까?"

 

 기린의 목소리에 약간의 의아함과 그득한 납득이 뒤섞여 물음표 끝에 점처럼 찍혔다. 물음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서로가 이 질답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또 주상이 모두를 따돌리고 모습을 감춰버린 모양이었다. 기린과 또래처럼 보이는ㅡ실 연령도 고작 한두 해 차이였으니 당연하겠다만은ㅡ어린 주상은 여리고 부드럽게만 보이는 외형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눈을 능숙하게 피해 몸을 숨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아랫것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금빛의 임금님과 흑빛의 기린이 사실은 뒤바뀐것이 아닐까 우스갯소리까지 돌 정도였다. 궁에서 소리높여 주상을 부를 수도 없고, 애초에 따돌림당한 입장에서 왕의 의지에 반하여 왕을 쥐잡듯 찾는 것도 왕께 감히 겨눌 수 없는 무례였기에. 방도를 찾아 여종들이 기린에게 달려온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리라.

 짧은 틈새와 간단한 문답으로 어렵잖게 많은 것을 짐작해낸 기린이 한 쪽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말간 얼굴에 미약한 곤란함이 어렸다. 그는 무의식이었겠으나, 무심코 따라가는 시선의 끝은 북서의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기린만이 알 수 있는 왕의 흔적을 그는 정확하게 밟고 있었다. 사실 그와 별개로 왕이 어떨 때에 숨는지, 또 어디에 숨는지 알고 있는 것은 그 하나뿐이기도 하였으니.

 

"걱정 마시고 해야 할 일을 하시지요. 일각이 급한 용무는 없지요?"

"예. 다만 해가 질 무렵부터는 회의가 있으시어..."

"두 시진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가실 겁니다."

 

 책임감 강한 왕이다. 설마 회의를 뿌리치는 일은 있을 리 없겠으나 상냥한 신수는 다정하게 여종을 위로했다. 그 말에 안도한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곧 몸을 물렸다. 청년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가 굳이 가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왕께서는 말끔한 얼굴로 회의에 들어오시겠으나...... 자비의 동물은 제 반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지 알고 있기에 기꺼이 그곳으로 걸음했다. 

 

 

 왕과 재보를 위해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을 넘어, 유독 왕이 아끼시는 우아한 버드나무를 타고 나서야 넘을 수 있는 거대한 바위를 지나, 사람 손이 닿기 힘들어 차마 관리되지 못한 풀숲에까지 선 기린은 눈을 감고 가만 숨을 죽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간간히 들리는 소리는 분명 눈물을 삼키는 소리였기에, 기린은 급격하게 울적해지려는 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울음소리는 선연해졌으나, 상대 역시도 그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숨 삼키는 소리가 잦아졌다. 

 셋, 둘, 그리고 하나. 기린이 시야를 가리는 풀을 긴 소매로 걷어내어 그 안에 몸을 감추고 있던 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슬 젖은 풀잎처럼 아롱거리는 시선이 물안개같은 엷은 청빛을 마주하고는 파르라니 떨렸다. 그리고 그 떨림이 멎기도 전에 붉은 비단 사이로 사라졌다. 슬픔의 기색도 눈물의 흔적도 미약한 부끄러움까지 모조리 소매로 감추는 모습을 보며 재보는 어쩔 수 없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주상. 이곳에 계셨나이까."

"......응."

 

 대답 끝에는 미처 흘리지 못한 물기가 남아 눅눅하니 젖어 있었다. 기린은 금 자수가 촘촘히 새겨진 소매로 얼굴을 꽁꽁 감추고는 차마 고개를 들지 않는 왕의 앞에 몸을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낮춰 자신을 삼가며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바람 한 줄기 둘의 머리카락을 한 번 스치고 지나갈 정도의 시간이었다. 주상. 부르는 목소리는 늘상 그렇듯 온화했다. 

 

".......노아."

"그래, 티티."

 

 왕이 소매를 내리고 얼굴을 보였다. 뺨은 이미 꽃물이 든 마냥 붉었고 눈가는 좀 더 짙은 발간 색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은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마냥 엉망이었다. 아이고. 기린은 터져나오려는 한탄을 애써 삼켰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 그리 속상했을까. 왕은 재보가 짐작해내지 못한 부분에서 마음이 다쳐 힘겨워하고는 하였기에, 기린은 그가 서럽기만 했다. 제 앞에 고두하여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버린 기린에게 고르고 골라 가장 멋진 이름을 내려줄 정도로 다정한 왕은, 그만큼 여린 구석이 있어 제가 짊어진 삼백만 국민들의 무게가 힘겨워 자주 울음을 터트리고는 했다. 제 반신인 기린에게만 그 모습을 허락하고 백성들에게 눈물짓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부터 그는 이미 왕의 재목이었건만. 본인은 도통 알아주지 않겠지. 속상한 것을 숨기며 재보는 가만 제 왕을 응시했다. 

 타인보다도 작은 체구의 왕은, 화려한 의복과 그보다 더 화려한 머리장식을 마치 짐짝처럼 짊어지고 동그랗게 몸을 말고 풀숲 사이 꽁꽁 숨어 울고 있었다. 그녀에게 빛나는 왕기를 기린인 그 외에 타인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도 이토록 기죽고 마음 상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 하늘의 짐승은 단 한 순간도 그녀가 왕임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재목을 가장 의심하는 사람은 단연코 그녀였다. 장날에 제 오라비 손이나 꼬옥 붙잡고 길가를 뛰어다니던 작은 상인집 막내딸 앞에 하늘에서 내려온 귀하디 귀한 흑기가 고두한 바로 그 순간부터. 제 그림자에 왕이 가려지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기린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제 왕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미안해, 노아. 또 찾으러 오게 해서......"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티티는 내 임금님인걸."

"그래도......."

"정말 괜찮아!"

 

 활짝 웃어주는 기린의 얼굴을 왕이 가만 응시했다. 순하디 순한 녹빛이 웃는 기린의 얼굴을 말갛게 보다가, 겨우 조금 닮듯이 휘어졌다. 민들레 홑씨마냥 작은 미소였으나 왕의 얼굴에 걸렸다는 것만으로도 기린은 대번에 안심했다. 왕은 기린의 표정을 샅샅히 살피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나란히 앉은 비밀장소는 시간이 지나고,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지면 사라질 장소였다. 돌봄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은 궁의 정원. 이곳은 왕이 없는 동안 황폐해진 나라를 급하게 정리하기 위해 뒤로 물러난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으니까.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면 왕이 울 장소도 사라질 터이고, 왕이 울 일도 사라지겠지. 왕과 재보는 똑같이 후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구름 두어 점만이 점점히 장식하고 있는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제 재보와 닮은 그 색을 가만가만 응시하며 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

"언젠가는 말이야."

 

 왕이 속삭였다. 멀리서 우는 풀벌레 소리에마저 휩쓸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으나, 옆에 앉은 재보에게는 천둥보다도 커다란 속삭임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왕의 속눈썹이 빛 아래 황금색으로 켜켜이 빛나고, 그 아래 박힌 녹옥이 물갈기질되어 찬란했다. 

 

"내가 울지도 않고, 노아도... 좋아하는 꽃이랑 나무를 잔뜩 돌볼 수 있을 정도로 평온하기를."

"......"

"그런 나라를 만들거야."

 

 속삭임은 곧 다짐이었기에, 왕의 결심 앞에서 재보는 그저 침묵했다. 가슴에 밀려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태어난지 스무 해도 지나지 않은 기린은 아직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기에. 왕이 고개돌려 재보를 보았다. 미약한 기대와 그보다 훨씬 거대한 걱정을 담아, 아직 어린 왕은 손뻗어 굳이 물었다. 

 

"노아도 도와줄거지?"

 

 걱정이 알알이 맺힌 석류알같은 눈동자를 보며, 노아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웃었다. 

 

"주상이 원하지 않으시더라도 저는 주상의 기린인것을요. 그렇지, 티티?"

 

 약속입니다. 뻗어진 손에 망설임은 없었다. 약속이야. 길고 하얀 새끼손가락이 매듭처럼 얽혔다. 세상에 발 디딘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년과 소녀는, 태생부터가 고귀한 흑기린이고 위대한 제왕이었기에. 어린 짐승처럼 서로의 털을 핥아주는 앳된 시기를 지나 위대한 날개를 펼쳐 나라를 다정하게 덮을 어느 미래를 꿈꾸며 지금은 그저 두 손가락만을 맺어 약속했다. 그들이 만들어 낼 길고 긴 태평성대는, 약관도 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약속에서 시작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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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