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이야기

2021. 1. 6. 01:00 from pokemon/Ram

 

 아이의 성장은 빠르다고 하지만, 오래오래 씨앗이던 소녀는 화석처럼 굳어서 사실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며 누구도 무시하지 않을 만큼 대단해지겠노라 다짐했던 10살의 소녀와 누구보다 대단한 트레이너가 되어서 당신이 날 버릴 수 없게 만들겠노라 작게 결심한 16살의 소녀. 나이를 먹었다고 하여 그 다짐을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 19살의 람은 그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15살 입양되어 딱 1년간 받은 사랑이 지나치게 달콤하고 가슴이 벅찰만큼 행복했던 탓인지, 마치 동전의 이면처럼 소녀는 자주 불안에 잠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람 앞에 섰다가 마지막 순간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 조금 더 착하고, 조금 더 순하고, 조금 더 고분고분하고, 조금 더 어린 착한 아이를 찾아서. 제 고집을 꺾을 줄 모르고 눈매가 사나우며 눈에 띄는 붉은 머리를 가진, 고개를 뻣뻣하게 쳐든 소녀는 자신을 꺾는 대신 눈물을 삼키고 악에 차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나는 트레이너도 될 수 없고 착한 딸도 될 수 없지만 누구보다도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바다 위에 당당하게 서겠노라고.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소녀는 아무도 듣지 않는 바다에 제 설움을 풀었다. 

 

 그런데 어머니 당신은 왜 내게 상냥한 걸까, 나는 전혀 착한 아이가 아닌데. 당신은 내게 팽도리를 안겨주며 트레이너가 될 수 있노라 길을 열어줬다. 무엇을 해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수많은 기회를 욕심껏 손에 쥐여줬다. 소녀가 미간에 힘을 주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해줬다. 어째서? 나는 당신의 대단한 커리어를 포기할만한 사람이 아닌데. 아직, 아닌데. 그런데.......

 

 아카데미 진학은 성장인지 도주인지 알 수 없을 선택이었다. 다정한 어머니라는 존재가 너무 낯선 나머지 거리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다가,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가 후회하기를 반복하고, 대체 왜 자신을 데려온 건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걸 믿어도 괜찮을지 의심하고... 소녀의 15살은 사춘기 시기까지 겹쳐 누구보다도 격정적인 1년이었다. 그리고 겨우, 정말이지 가까스로 그럼에도 괜찮지 않을까, 믿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람은 비바체 아카데미 입학을 결심했다.

 훌륭한 물 타입 트레이너 무지카가 보살피는 아카데미. 그곳에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서, 좋은 트레이너가 되고, 물 타입 체육관 문하생이 되고, 언젠가 짐 리더가 되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당신을 어머니라고 불러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떳떳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싶어. 바다를 누비는 경찰이 되고 싶다는 것은 소녀의 오랜 꿈이었고, 물 타입 짐리더는 당신이 열어준 새로운 꿈이니까. 나는 욕심껏 둘 다 붙잡고 전부 할거야. 람은 어릴 적과 꼭 같은 고집스런 표정으로 꿈을 삼켰다. 

 

 그리고 소녀가 한심한 바람을 타고 떠나온 머나먼 비바체 아카데미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꿈결처럼 상냥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리고 그다지 길지도 않은 삶 그녀가 사랑했던 물 타입 포켓몬들을 직접 품에 안을 수 있는 기회가 그리도 많아서. 감히 꿈꾸지 못하니 신 포도처럼 눈 감았던 그 전부가, 먼 발치에서 동경했던 그 모든 것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생활들이.....

영원히 잠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석이 부활장치를 통해 꿈에서 깨어나듯 포켓몬이 되는 것처럼, 소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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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