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니니까."
그럼요, 알고 말고. 내가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요? 소녀는 무심코 입술을 달싹였다. 웃고 싶었던 것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소녀도 모른다. 가슴을 쓸고 내려가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두근두근 점점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등 뒤로 숨긴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최선을 다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소녀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타고나기를 뛰어나게 영리하지는 않은지라... 어쩌면 그 필사적인 모양새가 티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람은 눈을 한 번 도록 굴렸다. 제 앞에 서 있는 녹턴은 음악가답게 펵 예민했지만 그만큼 제 관심 없는 것에 무심하게 구는 경향도 있으니 어쩌면 어렵잖게 제 이상함을 숨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도 알아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장 먼저 그리 생각하며 소녀는 고개를 들어 녹턴을 올려다보았다.
감히 한 끼 식사를 걱정할 정도로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제 삶이 비참했노라 말하지도 않겠다. 그녀는 그럭저럭 평범하게 행복했다.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나왔고 겨울에 얼어죽지 않을 만큼 미지근한 온기가 남은 이불 속에서 잘 수 있었다. 낡았지만 조심히 써서 물려입은 옷을 입고 기본적인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가끔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간식가게나 음반가게로 달음박질 칠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더군다나 믿을 수 없는 행운을 붙잡아 이제는 퍽 부잣집 아가씨 같은 차림새까지 할 수 있지 않은가. 언제 사라질 지 몰라 가끔 지금도 잠을 설치는 행운이지만, 그녀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기에, 람이 마음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운이 좋았으니까. 자신의 시야에서 볼 수 있는 단편적인 그대로. 사람의 마음이 강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자비롭기를. 그리하여 누군가가 강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타인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만큼 다정하기를. 람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내가 바라니 남에게 내가 바라는 형태를 그대로 따라하는 초라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이 초라함을 손에 쥐고 나는 반드시 성공하여 대단해지겠노라 이를 악물었던 초라한 사람인데. 여기까지 해낸 마음의 원동력은 나의 이 보잘것없음인데. 붉은 머리 소녀는 다시 한 번 숨을 삼키고 제 앞이 청년을 찬찬히 응시했다. 창백한 금속같은 분홍색 머리카락, 색이 다른 두 가지 눈동자,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 길게 뻗은 아름다운 손가락. 귀하고 곱게 자란 것처럼 보이는 멀쑥한 청년. 화면 너머에서 동경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제 앞에 서 있는 그를.
당신의 말은 옳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마음이 더 중요하니 제 양심을 따르며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말하는 람은 가혹하다. 당신이 현실을 논하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 하나 없음을 알고 있거늘 맨 처음 어처구니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던 건 하필 말한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피아노를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당신의 피아노를 내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너무 뛰어난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신을 보고 무척이나 실망했으나 그럼에도 놓을 수 없어 늘 쫒아가게 만들 정도로. 소녀의 표정이 잠깐 이상해졌다. 기쁜 것도 같고, 아니 슬픈 것도 같고.
환상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목소리가 내게 말했지만 현실을 살던 나를 잠깐이나마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건 당신의 음악이었으니까.
"나는 환상 속에서 살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가치를 강요하지도... 않아요. 돈이 절박한 사람에게 지금 내 말이 얼마나 못나게 들릴지도 알아요.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일 뿐이죠."
소녀는 그제야 평소처럼 제 표정을 만들 수 있었다. 눈썹에 힘을 주고, 어쩌면 화가 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절대로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것처럼 강한 표정.
"하지만 나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금과 똑같이 생각할 거에요. 가장 귀한 건 마음이고, 결국 그게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어요."
그리고 조금 토라진 것처럼 입을 비죽였다. 농담하듯, 조금은 부드럽게.
"......그리고 당연히 난 귀감이죠. 바보 녹턴 로제르.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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