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태어나서, 자신이 가진 쪽의 입장에 서서 아닌 쪽을 보게 될 순간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일견 그녀의 삶은 보잘것 없는 투쟁으로 가득하고, 각자의 불행이 있는 삶에서 소녀는 자신의 불행을 소화시키기에도 힘겨웠기에. 타인을 배려하기에 소녀의 삶에 찾아오는 타인은 드물었고, 혜성처럼 그녀의 삶의 대변혁을 이뤄낸 사람은 훌쩍 큰 어른인지라 소녀가 무언가 신경을 써 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한없이 많은 관심과 배려를 받는 입장이었지. 그 틈바구니에서 어린 소녀는 제 자신을 인간답게 가꾸는 데에 제 모든 심력을 모조리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멀고 먼 땅, 아카데미까지 왔다. 2년이나 시간을 투자하여 조금씩 배우고, 또 배우고. 끝내 졸업을 목전에 두고 나서야 겨우 주변을 둘러 볼 여유 따위를 가지게 된 람은, 그러니까. 이제 겨우 소중한 무언가가 조금씩 늘어나고 마음의 가시를 부드럽게 바꿀 수 있던 람은. 지금 이 상황에 쩡하고 완전히 얼어버렸다. 아, 대단히 말을 실수했다는 직감이 섬광처럼 등 뒤를 스쳐지나갔다. 제 말이...... 눈 앞의 사람을 상처입힌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생에서 한 번도 마주해 본 적 없는 난제를 앞에 두고 람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진심 여부와 무관계하게 사람은 사람을 상처 입힐 수 있다.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제 말은 모두 기만이 될 수 있고 지금 제 자신의 입에서 나올 모든 단어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소리가 될 수 있다. 소녀는 제 안 무언가가 일렁이는 기분을 느끼며 격렬하게 갈등했다. 샤론이 화를 낼까? 사실 지금도 우리는 싸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괜한 참견을 말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덮어버리면...... 그렇다면......
바다의 눈이 숲의 눈을 응시했다. 자신을 보지 않고 바닥 어드메를 응시하고 있는 숲의 눈을.
"......샤론에 대해서..... 나한테 설명해 줄 의무는 전혀 없어요. 말해주지 않아도 좋아요."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게 즐겁지 않은 과거나 실수의 흔적이라면 더더욱 그럴 터다. 누군가를 자세히 모르더라도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 과거를 상세히 안다는 것이 모든 증거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얼마든지 있고, 그걸 부러 캐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기만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샤론이 해내는 모든 배틀을 화면 너머로 보았다. 포켓몬 배틀로 직접 부딪혀 보기까지 했으니 알고 있다. 샤론의 진심.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상대로 서 주었는지, 얼마나 상세하게 이 감정을 받아내주었는지. 그 열정도 마음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샤론은 선생님으로서, 노력해줬다. 정말 많이 노력해줬다. 람 역시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손가락질 할 마음은 없었다. 누군가 샤론을 손가락질한다면 그 손가락을 대신 분질러버릴 마음도 충분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부터 내 입이라도 분질러야 할 지 모르겠다. 람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 끝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가 거절당할 게 무서워서 계속 지금처럼 있는다면 나아갈 수도 없어요."
현상유지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신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겁이 나서 도망치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람도 이 아카데미에서 발전을 노리고 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집에서 도망친 거기도 하니까. 힘들면 쉬고, 괴로우면 앉을 수도 있다. 손이 뿌리쳐질까 두려운 공포가 얼마나 거대한지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발을 질질 끌어도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그곳에 발목은 묶여 있으니까. 영영 도망치더라도 스스로는 알고 있을 테니까.
"한심한 모습을 또 보여주면 안 되나요? 여러 번 패배하더라도 다시 도전하는 모습은 한심한 걸까요? 거절당했으면서 매달리는 모습은 꼴사나운 걸까요?"
풀 타입과 전기 타입 체육관에 백 번 패배하더라도 꿋꿋하게 물 타입 포켓몬으로만 도전하는 모습은 한심할까? 바보같은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을 터다. 해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패배해서 슬퍼할 때에도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
거절당했을 때 꿋꿋하게 조금만 좋아해달라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꼴사납고 못나빠질수도 있지만, 거절이 두려워 승낙인지 거절인지 묻지조차 않는다면 관계가 변하지도 않겠지. 기다리고만 있는다면 고여버린다. 그리고 작은 호수는 언젠가 말라버리겠지. 그 안에 살던 작은 생명들조차 죽어버릴 것이다.
"......물론 이 사람 곁에 내가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나도 알아요."
저 역시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여기 왔으니까. 자격을 만들고 싶어서.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난 이제 자격이 없더라도 매달릴거에요. 나를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관계는 끝이라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그럼 사랑하게 만들어보이겠다고 말할 거라고요. 거절당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보고, 느끼고, 키워서. 자랐으니까."
계기도 이유도 이제는 상관 없었다. 손을 뻗어 주워 준 건 당신이고 잡은 건 나. 그 순간 관계는 맺어졌으니 한 쪽이 놓는다고 해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한참 못난 것 같고, 상대는 누구보다도 고결해보이더라도.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꼴사납고 세상에서 제일 못나서 정이 다 떨어지더라도, 그래도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라도 다시 자신을 잡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적발의 소녀는 밀빛 소녀에게 물었다.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무지카 선생님과 샤론 사이에 각별한 건 없나요?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샤론은 무지카 선생님과 같이 있었잖아요. 분명 몇 년도 넘게 같이 있었던 거겠죠. 그 모든 시간이 이미 각별해요. 샤론에게 선생님이 특별해지기까지의 시간이 무지카 선생님께는 아무 의미 없었을까요? 정말로?"
짧게 뱉었다. 세상에서 제일 못나고 제멋대로인지라,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제 자신이 싫어서 도망치고 싶은데도, 소녀는 끝내 똑바로 상대를 보며 이기적인 말을 눈앞의 사람에게 건냈다.
"......샤론은 이미 어리광부리고 싶은 누군가가 있잖아요. 수많은 사람들 중 막연히 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한테 가서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자격을 달라고 말해봐요. 시작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잖아요."
뺨을 맞아도 할 말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람. 소녀가 긴장한 손을 한 번 쥐었다 펴며 소리없이 심호흡했다. 하고 싶은 말은 했으니, 상대에게 어떤 반응이 돌아오더라도 감수할 각오 역시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