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이야기

2020. 12. 30. 00:44 from pokemon/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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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보는 세상은 무척 현명하다. 붉은 소녀는 보랏빛 소년을 보았다. 일견 차갑고 쓸쓸해보이지만 그건 분명 겉보기 뿐일 것이고, 정작 살고 있는 사람들은 풍족한 세상에서 다정하게 살 수 있겠지. 돈에 눈 멀었다는 손가락질도 어쩌면 그냥 부러워서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고. 자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얼마나 즐거운지 람도 뼈저리게 알았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당신처럼 행동하는 게 차라리 편하고 행복하겠지. 람은 녹턴이 풀어내는 긴 목소리 속 일부를 인정했다. 제 삶의 가치는 남에게 이리 굴어달라 제안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하고, 당신의 말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방식이다. 다만 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 뿐. 

 

  마음이 있어야 돈이 움직일까, 아니면 돈이 움직이기에 마음도 움직이는 것일까. 소녀의 이상은 사실 가냘프고 절박할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동화처럼 행복하게 마음이 있어서 행동해 준 것이면 좋겠다. 그녀는 타인의 자비로움과 배려심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규칙으로 인하여 자라났으니까, 그 감정들이 그들의 진심이면 좋겠다. 당신은 나에게 이상을 꿈꾼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토록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사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이기주의자다. 그러니 나는 내 바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정이고 그 사람을 이끌어내는 마음이며 선량함이다. 람의 행동은 모두 그 믿음 아래에서 나왔다. 믿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마음이 없다면 얼마든지 뿌리쳐질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으니까. 차마 발치에 매달릴 수조차 없을 만큼, 소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믿음조차 없으면 소녀는 무엇이 되는가? 

  아무것도 아닌 소녀는 많은 것을 가진 소년 앞에서 허리를 펴고 서 있는 자기 자신이 부끄럽지 않도록 마음을 정비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 속에서 자라온 소년이 당연히 현실을 보며 살아가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자란 소녀는 먼 곳의 이상을 응시하며 고개를 들었다. 

 

"진부한 해피엔딩이면 안 되나요?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잘 사는 길을 처음부터 고를 수 없는 사람은 진부한 해피엔딩이라도 고르고 싶어요. 또, 처음부터 풍족하더라도 지금의 내 행복은 그게 아니에요."

 

  부족함과 함께 자란 사람이 잡고 자랄 수 있는 길은 한정적이었고, 람이 잡은 길은 결국 이런 길이다. 자존심만 가득 우겨넣고 자라서는, 그 무게로 제대로 발에 땅을 붙이고 설 수 있도록 삐죽삐죽하게 자란 길.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제 본인의 믿음과 신념만으로 텅 빈 길을 고를 정도로 삐뚤어지게 우직한 길. 

  나를 사랑해주세요. 내 손에 아무것도 쥐여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보잘것 없고 한심해서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초라한 마음. 

 

"돈이 없어 봤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행복을 모르던 시절이 있어 보았기에 하는 말이에요. 한 순간의 행복이 내 영원을 만들어냈어요."

 

  그래, 그 때의 행복...... 넓은 바다에서 노래하는 물 포켓몬들의 모습을 태어나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원히 이 풍경의 모든 것을 사랑할 것을 알았다. 파도 소리에 섞여드는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음악을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알았다.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밀로틱의 물의 파동을 보았을 때 느껴던 감격을 지금도 기억한다. 내 인생에 방점이 찍힌 순간을 기억한다. 나에게만 주어진 마음이 아닌데도 이렇게도 선명하게 인생에 남아 영원을 그려냈거늘, 나에게만 주어지는 마음을 어떻게 영원하게 간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 눈에 나는 참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겠죠. 맞아요, 전 세상을 다 뒤져 봐도 끝없는 금전과 다정한 마음 중에 마음을 솔직하게 고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다지 없을 것임을 저도 알아요. 하지만 마음을 선택해주는 사람이 분명 있으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나는 세상이 좋아요. 한 번 더 마음을 믿어 볼 용기가 생겨요.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어요."

 

  행복하게 오래오래, 타인의 기억에 남을 만큼. 무척 절박하고 사랑스러운 바람이다. 퍽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는 틈새에서 소녀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은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시작한 말에 기억이 담겨 있다.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누가 알아주는가?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얼마나 기억하고 간직할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서 누군가의 기억에 남으면 안 되는 것인가? 당신이 하는 말에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기억받고 싶다는 바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들리는 건 소녀의 대단한 착각일까? 

 

"그러니까 나는 마음이 영원하리라 믿어요. 잊혀지지 않아요. 이곳에 있는 모두가 내 삶에서 지나가는 사람이어도 지금 느꼈던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고, 내 삶의 마지막까지도 내 안에 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게 나를 살아가게 만들어요."

 

  다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이 순간은 제 영원한 행복이 되겠지. 이건 제 나름대로 현실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행복조차 없다면 더더욱 괴로워질테니까. 결코 그럴 일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최후의 최후 한 구석에서는 버려졌을 때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으니까. 람은 녹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과 가치를 가지고 대화하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미래의 제 기억 속에서 한 가지 색으로 빛나도록, 상세히 기억해내도록 선명하게 당신을 보았다. 

 

"그리고 당신도 영원히 기억하겠죠. 앞으로 당신에 대한 소식은 한 번도 듣지 못하게 되더라도요."

 

 

 

 

 

공미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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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