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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06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2. 2019.02.03 꽃과 여우와 꽃밭
  3. 2019.02.02 온천과 달걀과 어인과 꽃
  4. 2018.12.10 초능력자AU
  5. 2018.12.07 생각의 끝에는
  6. 2018.12.02 요괴AU 3
  7. 2018.12.01 요괴AU 2
  8. 2018.11.29 요괴AU





"다녀왔습니다."

"그래. 헤리 왔니."


 다녀왔다는 깔끔한 인사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헬리오스는 그 익숙한 반응을 심드렁하게 넘기고 느긋하게 집을 살폈다. 벌써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으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무튼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귀염둥이 막내가 중앙으로 공부하러 가 버린 지도 벌써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였다. 평소였다면 헬리오스 역시도 이 분위기에 동화되어 방에 가서 쓸쓸하게 하리가 준 선물들을 살피거나 간식이나 입에 넣거나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헬리오스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도저히 지우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후후 웃고 있는 헤리오스를 이상하게 본 건 그의 쌍둥이 누이였다. 


"뭐야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왜이래?"
"셀레네.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될 텐데~?"

"뭐래. 진짜 잘못 먹었네."


 엄마 또 헬리오스한테 뭐 먹인 거 아냐? 안 먹였고 안 했어 이 지지배야!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보는 두 모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후후 음흉하게 웃던 헬리오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편지봉투. 직감적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만, 경이로운 시력으로 편지봉투 위에 또박또박 적힌 하리오티 롭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두 사람이 곧장 손을 뻗었다. 내놔, 우리 하리 편지! 먹이를 잡아채는 매보다도 용맹하게 편지를 노리는 두 모녀 사이에서 날렵하게 빠져나요며, 헬리오스가 편지를 뜯었다. 여전히 손은 헬리오스를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날아왔지만, 평범하게 빼앗길쏘랴. 이 무슨 아쉬운 말씀. 내가 이걸 왜 고이 들고 왔는데. 캬, 나 진짜 착하다. 먼저 안 뜯어보고 같이 보고. 저 홀로 추임새를 넣으며 두툼한 편지를 펼친 헬리오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편지의 서두가 시작되자, 모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얼른 뒷부분을 읽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요리를 하던 아버지마저도 하던 것을 급히 정리하고 다가오는 모양새에, 헬리오스도 얌전히 뒷부분으로 눈을 옮겼다. 저 역시도 내용이 궁금한건 매한가지였다. 


"안녕하세요, 하리오티에요. 잘 지내고 있나요? 가족들은 모두 건강한가요? 저는 건강합니다."

"내새끼 건강해서 다행이다만... 우리 연약한 막둥이가 거기까지 가서 몸이라도 상했으면 어떻게 해... 걱정할까봐 저렇게 써 둔 거면 어째?"


 하리오티의 언니 셀레네는 주접을 떨었고 (셀레네는 신전 기사단에서도 말수 적고 과묵한 편에 속하는 무게 있는 신전기사였다.) 가족들은 무언으로 그에 동의했다. 헬리오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문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 와 본 중앙은 아주 신기한 곳이었습니다. 교수님들도 아주 멋지고요. 다른 아이들도 많이 만났어요."

"우리 딸 낯가림도 심한데 잘 지내고 있을까?"


 하리오티의 아버지는 영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수줍음도 타고 부끄러움도 많은데다가 반응이 주로 새침하여 초면에는 까칠하다는 인상을 주는 하리오티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친구를 사귀고 싶어했었다. 제 어린 딸의 수줍은 희망사항을 알고 있던 아비는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았다. 


"이곳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방을 함께 쓰고 있어요. 저는 디케이아라는 어인 친구와 누아라는 드라이어드 친구와 함께 방을 쓰고 있습니다. 룸메이트들은 다들 아주 좋은 아이들이에요."

"어인이랑 드라이어드인가. 막둥이는 다 처음 보던가?"
"처음 보지? 이 근처엔 바다도 없으니까... 드라이어드는 원래 좀 귀하고."


 어인이나 드라이어드도 많나? 건너 들은 바로는 드라이어드가 우리 공주님까지 다섯이나 있다던데. 다섯? 진짜 많이 있긴 하구나. 두 쌍둥이 남매가 두런두런 말을 이었다. 지금 대화할 때니? 어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헬리오스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 학당에 왔을 때에는 많이 당황했지만, 지금은 꽤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늘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채집하는 건 정말로 즐겁습니다."

"막둥아 내가 채집 대신 해 줄 수도 있는데!"

"나도."
"하아..."

"주책 말고 얼른 읽어!"


 아 알았어! 헬리오스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가끔은 가족들이 정말 보고싶을 때도 있지만 몽몽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친구들도 꽤 많이 사귀었습니다. 서로를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사람이 생긴 건 정말, 정말, 정말 기쁩니다. 이건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지만요."

"우리 막둥이가 우리가 보고싶대! 비켜봐 난 중앙에 가야겠어! 중앙기사 까짓거 내가 해내고 만다!"

"우리 공주님이 친구를! 으아, 집에 초대하고 싶다! 나도 얼굴 보고 싶어!"

"은퇴 취소하고 복귀하고 싶다...... 당신의 신실한 종을 중앙에 보내주세요 누스 님......"

"자, 다들 정신차리고... 제정신 잡아요 얼른."


 아버지가 온갖 주접을 다 떠는 가족들을 온화하게 붙잡았다. 그런 아버지도 하리의 편지 문장에 마음이 들떠서 들썩거리고 있었으니, 롭 가의 중심은 단연코 하리오티였다. 하리오티가 집에 있었을 때에는 공주님처럼 막내를 보살피느라 늘 정신이 없었고, 소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에는 제 이름이 막둥이 아니면 공주님이라 착각했을 만큼 물고 빨았다. 하기야, 100살이 넘는 나이에 보게 된 어린 딸이나 70이 넘은 나이에 생긴 까마득한 막내가 어찌 귀엽지 않으랴. 하리오티가 가족들 앞에서만큼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마냥 어리광을 피우는 데에는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학당의 친구들은 그런 모습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테니 절대 비밀이었지만) 

 물론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기까지는 꽤 많은 일이 있었고, 어린 하리오티는 제 혼자 맘고생하고 우는 일도 꽤 잦았지만, 지금은 모두 해결되고 롭 가는 견고하고 온전하게 행복했다. 막내가 친구를 원했기에 헬리오스는 루케루카 학당의 이야기를 물어왔고 셀레네는 막내의 입학 가불가 여부를 확인하여 막내에게 학당에 가는 것은 어떻겠냐 물을 정도로 사랑했다. 하리오티를 매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막내의 행복을 위해 학당에 보내준 것은 그들의 사랑법이었다. 등나무 소녀는 그런 가족들 품에서 자랐다. 


"연금술이나 신성마법도 배우고, 흑마법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이것저것 배우는 게 다들 재미있었어요."

"우리 딸은 공부도 잘 하네."

"사실 공부같은거 못 해도 괜찮아.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건 맞아."


 아, 쫌. 내가 읽잖아. 헬리오스가 한 번 투덜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채집을 위해 돌아다니다보면 종종 몬스터를 만나요. 운이 없는 날에는 자주 만난답니다. 특히 저는 사막을 자주 다니는데, 그래서 그런가 사막의 독주를 자주 봐요."

"사막의 독주?"
"그 전갈같은 걔? 나한테야 한주먹거리라지만 우리 하리가?"


 아버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강인한 세 명의 모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그 연약했'던' 막내가 열심히 강해져서 눈의 여왕을 이기기 위해 아티팩트를 휘두르고 다닐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얼굴로 가족들의 표정에 걱정이 번졌다. 


"황야의 늑대 같은 것도 만들면서, 이러니저러니해도 힘내고 있답니다. 다음에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볼 거에요. 집에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을 거에요."

"귀여워라."

"귀여워..."
"우리 막내 귀여워."


 그 뒤로도 편지는 한두문장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추임새가 이어졌다. 두툼한 편지에는 온갖 소녀의 사소한 일상이 즐겁다는 듯한 기색으로 종알종알 적혀 있었다. 돌로레스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거나, 아일이 내 천사님이 되어주었다거나, 첸이 바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는데, 나도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던가, 수영을 배우고 싶어서 숨 참는 연습을 한다거나, 누아는 우리 방에서 유일하게 일찍 잠드는 친구라서 방에 들어가면 늘 자는 얼굴을 본다거나, 디케이아와 함께 별을 구경했다거나. 블루밍과 마얀은 상냥하고 좋은 친구들이고, 블랑은 누아의 쌍둥이인데 아주 고운 색 장미라던가, 그리트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서 같이 피크닉을 갔다는 내용. 유라와 친구가 되어서 말을 놓았고, 사르힌은 아주 얄밉게 굴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그런 소녀의 행복한 일상이 빼곡하게. 

 그렇기에, 어린 소녀를 품에서 떼어놓고 오랫동안 걱정했던 가족들의 표정이 뭉근하게 풀어져 안심할 정도로 즐겁게 쓰여진 일상의 끝무렵을 소녀는 가족들이 만나고 싶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로 마쳤다. 


"잘 지내고 있다면, 정말 다행이네......"


 소녀의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인 편지를 쓸어내리며 소녀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안도해서 웃었다. 소녀는 드라이어드였고, 운석에서 깨어난 아기는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존본능처럼 발현한 마법을 소녀는 내내 경계했지만 동시에 평생을 함께하며 살았다. 소녀가 이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녀로 살아왔던 이유는, 절반이상이 그녀의 사랑스러움이라고 가족들은 믿었지만, 마법의 덕도 역시 없진 않았으리라. 가족들은 하리오티에게 납치나 사냥꾼을 걱정하여 낯선 이에게 늘 조금씩은 쓰라는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소녀가 그 덕분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했다. 


 어쩐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소녀의 활짝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가족들은 집의 어린 막내에 대한 그리움을 삼켰다. 편지에 묻어 온 옅은 등나무 향기가 집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강렬하게 맴도는 느낌이었다. 어린 막내에 대한 그리움에 한숨을 내쉬며, 헬리오스는 편지를 단정하게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곧장 셀레네와 어머니가 편지를 다시 펼쳐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는 모양새를 보며 청년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귀여운 막내야, 이것 봐. 네가 마지막에 끝내 언뜻 비췄던 불안은 이토록이나 불필요한 기우였는걸.





공미포 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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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소녀는 사뿐사뿐 걸었다. 본디 소녀의 움직임은 제 가족들을 닮아 퍽 절도있는 구석이 있어서, 어쩐지 직진으로 그 발걸음 끝에 있는 사람은 묘한 위압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이는 마을에서 하리오티를 곤란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번 그리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난감한 듯 미소짓는 그리트를 보며 하리오티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옆 자리에 털썩 앉아 웨더폭스와 같은 풍경을 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음..."

"하리오티."

"하리오티."


 저는 그리트에요. 알고 있어요, 그리트. 하리오티의 반응은 썩 새침하다 못해 날카로웠다. 사실, 구 중앙 신전인 이 루케루카에서 만나 친구가 된 학당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검증되어있는, 어떤 식으로든 안전한 사람이라는 일차적인 경계를 처음부터 넘고 시작했지만 그리트는 아니었으니까. 하리오티는, 눈 앞에서 그리트가 곤란을 겪는 걸 견디지 못할 정도로 상냥했지만 그리트를 선뜻 제 친구로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경계심이 높았다. 드라이어드의 특징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하리오티 본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소녀는 낯선 이에게 제 마음의 벽을 손쉽게 내려주지 않을 만큼 단호했다. 

 허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할 수 있기에, 소녀는 기꺼이 그리트에게 자신의 선물을 건냈다. 


"이거 받아요."
"이건......"


 흰 목화에 나비의 푸른 가루를 뿌려 장식하고 벨베티로 단단하게 묶은 것. 푹신하고 희끗한 화관이었다. 소녀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트의 귀가 몇 번 쫑긋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소녀는 덤덤히 말했다. 선물이에요. 이 꽃밭을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물론 난 아직까지도 온전하게 당신을 믿지는 않지만.... 말끝을 늘이는 소녀의 눈동자가 일순 날카로운 금빛으로 번쩍였다. 그래도 당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간이 흘러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해진다면,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소녀는 가벼이 제 희망사항을 읊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까딱였다.


(공미포 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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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우왓... 진짜 뜨거워요... 첸의 옆에 앉은 소녀는 손을 온천 표면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허연 김이 펄펄 올라오는 물은 질 좋은 상급 온천수였지만, 그만큼 평소 목욕물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애초에 하리오티는 찬 물을 훨씬 선호해서, 적당히 미지근한 물 정도만 쓰고는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사방팔방에서 삽으로 온천수를 파느라 그럭저럭 단련은 됬다고 생각했는데, 온천에 직접 들어가는 건 느낌이 또 확연히 달랐다. 소녀는 뜨끈뜨끈한 온천물이 발을 데우는 감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볍게 온천에 발을 찰박거리던 하리오티는 몸에 힘을 빼고 조금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막 터진 온천답게 주변의 습기는 어마어마했고, 열기와 습기까지 더해져 산채로 삶은 드라이어드가 되는 기분이었지만 어쩐지 피로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원래는 온천을 지금 쓰면 안되는 것 같지만...... 몰라요, 괜찮겠지...... 오늘 정말 열심히 노동했던 소녀는 배 째라 정신을 예리하게 세우며 얌전히 온천을 즐겼다. 몽몽 역시도 상태는 비슷했다. 어쩐지 가지가 쳐지고 꽃이 늘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알 바랴. 시들면 다시 피우죠 뭐...... 오늘 하루 종일 땅을 팠던 소녀는 뻔뻔해져 있었다. 몽몽 역시도 녹은 찹쌀떡처럼 소녀의 머리 위에 쭈욱 늘어져 있었다. 삡삡뺩 삐삐쨔쀼. 그래그래, 쉬는 게 제일 좋아... 재잘재잘 울어대는 몽몽의 깃털을 살살 쓰다듬어주던 하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 맞아. 첸, 이거 같이 먹을래요?"

"?"

"아까 신전기사님께 받았는데......"



 쨘. 소녀가 꺼낸 건 온천 달걀이었다. 한창 땅을 파고 있던 하리를 보고 있던 한 기사가 소녀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세시 님의 만쥬를 얻고 싶어서 계속 헤매느라 이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이제 얻을 것도 다 얻고 나니 소녀의 마음은 몹시도, 아주, 정말 너그러워져있었기에 이제는 달걀이 충분히 눈에 들어왔다. 꽤 두둑하게 들어있는 온천달걀을 주섬주섬 꺼내며 하리가 절반을 첸에게 넘겨줬다. 



"오, 고마워."

"천만에요!"

"어디서 났어, 이건?"

"지나가는 기사님이 주셨어요."



 레니스 교수님께 귀뜸이라도 들었던 걸까요? 글쎄. 교수님이 막내라고 하지 않았나. 아, 맞다. 음...... 그럼 막내의 제자들을 고생시키는게... 미안해서? 그건 좀 설득력 있네. 달걀껍질을 까며 두 사람은 잠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몽몽은 내려와서 먹어. 당연히 줄 거지? 하는 표정으로 늘어져 있는 제 머리 위의 새에게 말하자, 몽몽은 얌전히 내려와 하리의 무릎 위에 챡 하고 자리잡았다. 소녀는 달걀을 조금 부스러트려 노른자를 조금 나눠주었다. 근데 몽몽이 달걀 먹어도 괜찮아? 잠시 멈칫하기는 했지만, 기분 좋게 념념 잘도 먹는 몽몽을 보며 괜찮다보다 넘기는 일도 있었다. 어인과 드라이어드와 새 한 마리가 달걀을 입에 넣기 시작하자 주변은 잠시 조용해졌다. 소녀의 표정은 점점 평화로워졌다. 물은 따뜻하고, 몽몽도 있고, 입에 간식까지 들어가니 이쯤되면 마냥 행복한 수준이었다. 


 소녀의 변화는 꽤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제 몫의 달걀을 깨끗하게 먹어치운 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온천 특유의 냄새밖에 나지 않던 주변에 슬금슬금 다른 향이 섞이고 있었다. 



"꽃 향기."

"헉."



 흰자를 오물오물 먹던 소녀가 순간 덜그럭 멈췄다. 또 너무 기분 좋았던 모양이었다. 설마 가지까지 튀어나오진 않았겠죠? 더듬더듬 손을 뻗어 가지를 만져본 하리오티는 살짝 올록볼록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매끈한 가지에 안심했다. 늘 조심하려 노력했는데 어렸을때는 조절이고 뭐고 도리어 펑펑 풍기고 다녔던 게 향이었기에 조절이 영 힘들었다. 급히 손을 휘저어 향을 날리려는 하리를 보며 몽몽이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제 몫의 노른자를 다 먹어치운 몽몽은 핍핍 울며 다시 하리의 머리 위에 챡 앉았다. 



"으으... 미안해요, 첸. 일하다 쉬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만."

"아니, 별로."



 영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절절매는 하리오티를 보며 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최소한 하리오티가 겉으로 보기에는) 첸을 보며 소녀는 매우 안심했다. 좋은 사람! 소녀 안에서 소년의 이미지가 조금 더 좋아지며, 소녀가 종알종알 옆에서 다른 화제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수영 말이에요. 온천에서는 역시 하기 힘들겠죠? 여기서 숨을 참는 연습을 했다가는 완전히 얼굴이 익어버릴거에요...... 




공미포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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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초능력자AU

2018. 12. 10. 00:57 from others/Otohara Ruka

나는야 에유팡인.... 뭐든지 주워먹는다네.... (기타침)

센티널버스AU 같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잘 모를수도 있고 해서 초능력자가 존재하는 세계관 / 초능력자를 관리하는 기관이 있음 < 이걸 기반으로~!

*




복도는 색감을 완전히 뽑아낸 것처럼 희거나 회색빛이 돌았다. 마치 실험실같은 이 공간은, 처음 이 복도를 걷는 사람을 짓누르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청년은 엷게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 중간중간에는 문과 창문이 붙어있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안쪽에서는 바깥을 볼 수 없어요." 곁에서 함께 걷던 이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능력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실험하고 시험하는 장소이다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만들어두는 게 효과적이라는 설명 역시 이어졌다.

 덕분에 이 층으로 넘어오는 보안이 상당히 까다롭지만요. 하지만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복도에서 모른다면, 능력자가 폭주하거나 할 때 복도에 있는 사람들이 대피하기 늦어져요. 능력자들을 대하는 일에서는 작은 망설임과 사소한 판단미스가 큰 문제가 되고는 하죠. 늘 그렇듯이. 


 상대의 목소리는 물 흐르듯 유려했고,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던 청자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방은 반쯤 비어있었고 나머지 반쯤은 차 있었다. 물건을 띄우거나, 불을 뿜어내거나, 무언가를 압축하듯 구기고 있는 사람들을 흘리듯 지나치던 청년은 문득 하나의 창문 앞에서 멈춰섰다. 관리번호 1223. 안쪽의 능력자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 복도만 걸어도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능력자였음에도 청년이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능력자라고 보기에 상대가 너무나도 이성적으로 보였다. 능력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폭력적이 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위험하다고 분류되어 관리대상이었다.) 감정표현이 크고 활발한 그들은 몹시도 외향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능력자들의 대체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허나 1223번은 청년이 이제껏 본 그 누구보다도 얌전한 능력자였다. 

 모든 방에는 바깥과 연결되는 창문이 없었기에, 1223번을 비추는 건 환한 형광등 하나였다. 언뜻 보아서는 능력자라기보다는 관리자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소년을 능력자라 확신한 것은 그가 온통 흰 실험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해와 같은 머리카락은 검푸른 빛이었고, 피부는 햇빛이라고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처럼 희었다. 책의 종이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얇은 손목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칠 정도였다. 1223번은 밖에 누가 저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 것처럼 (애초에 내부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고요한 표정으로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속눈썹이 길고 뺨이 뽀얀 그는, 실험실의 한가운데보다는 다락방에 숨어 램프 아래 소리 죽여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소년이었다. 

 그래, 소년. 청년이 걸음을 멈춘 두 번째 이유는 상대가 1223번이 이곳에 있기에는 너무도 앳되었기 때문이었다. 앉아 있어도 키가 길쭉하게 큰 건 보였지만, 실험복에서 빠져나온 몸의 선이나 골격 따위를 보면 성인과 아이의 경계에 선 특유의 형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청년은 가만히 소년을 응시했다. 청년의 시선이 고정되고 발걸음이 멈추자, 함께 걷던 동행자도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갔다. 아아. 상대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토하라 군이네요. 처음 보죠?"

"네. 어려 보이네요."

"실제로도 어려요. 이제 열 여덟이던가, 일곱? 열 아홉은 못 되었을 거에요."

"미성년자입니까?"


 청년이 미간을 확 좁혔다. 동행자는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 너무 그러지 말아요. 보호자의 허락과 본인의 허락, 둘 다 받고 이곳에 있는 거니까요. 상대의 너스레에 가까운 말에도 청년의 미간은 여전히 단단히 좁혀져 있었다. 보호자가 이곳에 있는 걸 허락했단 말입니까? 청년의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짙게 실려 있었다. 동행자 역시도 그 감정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기에,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상냥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오토하라 군의 가문은 이 쪽 실험과 연구에 꾸준히 후원을 하고 있거든요. 정계 쪽에도 이어져 있고. 그 쪽도 유일한 후계자가 설마 능력자로 각성할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어쩌겠어요. 그 쪽도 체면이 있으니...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을 거에요."


 그런 이유로? 청년은 얌전히 두꺼운 책을 무릎 위에 얹고 책장을 넘기는 소년을 다시 한 번 응시했다. 소년의 흰 피부는 이제 창백한 혈색으로도 보였다. 색감이라고는 소년이 가진 머리카락과 들고 있는 책의 표지가 전부일 정도로 하얀 방에서, 소년은 흰색에 먹혀 사라질것처럼 연약해보였다. 청년이 불만족스러운 신음소리를 짧게 흘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책에서 떨어진 소년의 시선은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문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강렬한 착각이 청년을 사로잡았다. 소년의 눈은 강렬한 파란색이었다. 새파란 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눈이 크게 떠지고, 얼어붙은 것처럼 굳은 청년에게 소년은 천천히 다가왔다. 소년의 손짓 한 번에 허공에 가벼운 파도가 일었고, 소년이 덮은 책의 끝장에서 종이 한 장이 빠져나와 소년의 손에 빨려들듯 흘러들어왔다. 


 소년은 그 종이를 뒤집어 창문에 붙였다. 청년은 이제 그 종이에 무엇이 쓰여져 있는지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서류였다. 소년의 신상정보가 적혀 있는 서류. 소년은 청년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오토하라 루카. 18세. 남자. 재해급 능력자. 능력명 대해大海. 

 이쪽이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마치 이쪽을 보는 것처럼 반갑게 웃었다. 재해급이라면 어떤 능력이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니, 실제로 소년의 눈에는 이쪽이 보일지도 몰랐다. 무표정하게 책을 읽고 있던 청년은 마치 공간에 잡하먹힐 것처럼 연약해보였는데, 시선을 마주하고 미소짓는 청년은 깜짝 놀랄 정도로 생동감 넘쳤다. 인형이 살아 걸어 다니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급격한 변화였다. 

 청년은 무심코 창문에 손을 대었다. 창문의 싸늘한 냉기만이 청년에게 현실감을 선물하고 있었다. 소년이 손을 들어 안쪽에서 창문에 손을 대었다. 마치 겹쳐진 것처럼 마주댄 손끝은 차갑기만 했지만, 청년은 이것이 소년이 저에게 건내는 최대의 호의로 가득찬 인사임을 깨달았다. 바다를 닮은 소년은 파도처럼 밀려와 그에게 포말처럼 웃어주고 있었다. 










 ** 


아래로는 썰백업


 기본적으로 능력자와 관리자가 있고... 센티널버스au라면 가이드가 있어야 센티널이 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할까말까 고민중... 그냥 능력자의 서포터(멘탈부터 능력까지) 모조리 관리하는 전담 가이드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고... 능력자는 어떻게 각성하느냐에 따라서 다르지만 큰 충격이나 신체적 이상을 겪고 각성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좀 불안하다는 설정도 있으면 좋겠다 아주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외향적이라기보다는 음... 활발한...? 감정적인 게 제일 어울릴듯 정신의 무언가로 각성했기때문에 능력도 감정에 크게 영향받고 막 그러면 좋겠다 


 루카는 당연하지만 바다 관련... 대해? 능력명은 그런 거 정도면 좋을 듯 이름은 대해지만 물을 만들고 움직이고 조종하고 그런 능력인데 루카는 머리가 좋아서 물의 구조까지 파고들어갔기 떄문에 그쪽까지 다스릴 수 있는거고... 대해라는 건 바다만큼이나 거대한 물을 지배 하에 둘 수 있기 때문이면 좋겠다 겉으로 보기에 가냘픈 미소년이 사실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자라는 사실... 너무 짜릿하니까(?


 재해급/재앙급(S) - 천재급(A) - 선별급(B) - 능력급(C) - 마술급(D) <여기서는 관리도 받지 않는 정도... 나에게는 네이밍센스같은거 없어... 아무튼 재해급은 별로 없었으면 좋겠다 조금... 소수.. 조금... 애초에 능력자 자체도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을듯. 급을 정하는 건 능력의 강력함/능력의 유지도/능력의 안정도 세 개로.. 루카는 강력함 안정도 유지도 전부 높아서 SS 판별을 받은 재해급... 유지도나 강력함은 높은데 안정도가 낮아서 관리자 백업이 필수인 사람들은 S 혹은 A (이 케이스가 꽤 많을 듯)


 각성한 건... 14살... 14살이지만 안정도가 워낙 높아서 전담 관리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되는건가? 사실 안 됩니다... 근데 루카가 18살까지 성장하는 4년 내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다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을듯 안정도도 특출나게 높고 근데 사실 자기자신을 제일 경계하고 자신의 폭주를 신경쓰는 건 루카 본인이어도 좋다 루카에게는 특별히 여러가지 혜택이나 그런게 주어지지만 본인이 거절하고 본인이 조심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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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생각의 끝에는

2018. 12. 7. 00:51 from others/Otohara Ruka




 소년은 느릿하게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은 조금 땋아 반으로 묶어 늘어뜨린데다가 늘 곱게 빗질을 했지만, 조금씩 뻗치는 부분이 있었다. 루카는 제 머리를 완전히 얌전하고 반듯하게 만들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교실의 앞쪽에서는 한창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늘 성실한 모범생이었던 소년은 오늘따라 유독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의 손은 펜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큰 의미 없이 몇 번 종이를 만지작거리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흰 종이에 닿았다. 

 생각에 빠진 소년은 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등학생이 되어 성장이 끝나고, 얼굴에 앳된 티만을 남기고 성인의 흔적이 묻어나기 시작하면서 그 무의식적 습관은 더욱 심화되었다. 펜 닿는 곳에 굳은살이 배인 손가락이 가만히 백지를 쓸어내렸다. 창가 근처에 앉은 소년의 시선은 책상에 박혀 있어서 언뜻 보기에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보였기에, 아무도 소년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았다. 창문을 가리는 커튼 사이로 짬짬히 쏟아지는 햇빛도 소년의 사고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도리어 심해와 같은 머리카락에 내리쏟아 파도처럼 소년의 머리카락을 밝게 만들기만 했다. 


 소년은 가끔 이런 식으로 생각에 잠겼다. 가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조금 자주. 어쩌면 종종. 늘 이런저런 공식과 계획으로 잔뜩 돌아가던 머리가 휴식을 주장할 때. 가끔 찾아오는 두통이 머리를 잠식할 때. 아무도 곁에 없는데 무엇을 할 지 생각해놓지 않았을 때. 악몽을 꾸고 난 직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괴로워져서 숨을 내뱉기 힘들 때. 그럴 때마다 소년은 잠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떠올린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쪽에 가까웠다. 그의 평화는 늘 한 명의 존재를 필요로 했다. 숨을 들이마쉬었다가 내쉬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아주 당연하게 소년의 머리를 빼곡하게 채워서 소년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큼 소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있었다. 

 늘 당신이 있어서......

 

 루카는 시선을 내깔고 흰 종이에 조금 눌러 쓴 글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좋아하는 이유를 꼽아 보자면 눈 한번 깜박이는 새에도 몇 개나 꼽을 수 있었다. 빛 아래에서 반짝이듯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 흰 피부와 자색 눈동자. 조금 거친 듯 보이지만 늘 저를 보면 상냥하게 풀어지는 표정, 다정한 목소리, 애정이 가득한 시선. 어렸던 자신을 내치지 않았던 그의 다정함과 내면의 성실함. 닿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자신을 배려하여 자신이 인내하는 그 마음가짐까지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가끔은, 그는 자신을 그저 동생으로만 보는 것인데 저 혼자 욕심을 내어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우울하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얽히고 곧장 휘어지는 그 자색을 응시하고 있다보면 그 불안함이나 우울함도 한없이 빛바래 희석되어 사라졌다. 보고 있자면, 언젠가 끝마쳐 없었던 것처럼 접혀진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을 믿고 행복해지고 싶어졌으니까. 

 

 당신이 왜 이렇게 좋을까. 소년이 천천히 눈을 감고 짧게 숨을 뱉었다. 저 홀로 시작했던 짝사랑에 응답해준 그에게 늘 감사하고 있었으나 소년은 언제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좋은 걸까. 당신은 나를 왜 좋아하는 걸까. 소년의 성정상 그는 답을 찾았다. 소년의 마음에 빠듯하게 들어차는 만족스러운 답은 아직까지도 내리지 못한 채였다. 

 가끔은 사랑에 의문을 품을 때도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까? 허나 소년 그 자체가 곧 그가 느끼는 사랑의 증거였기에, 의문은 곧 헛웃음과 함께 종식되었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이름도 붙을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 사이에서도 당신만 생각하면 다른 모든 게 사라져버렸다. 당신이 내 생각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이를 어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루카는 눈을 뜨고 커튼 사이로 조각처럼 언뜻 엿보이는 하늘을 보며 웃었다. 

 아, 당신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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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요괴AU 3

2018. 12. 2. 03:29 from others/Otohara Ruka

전 몰랐지 이게 3편까지 올지... 근데 오더라구요 모든 상황은 저 좋을대로 만들어낸 날조이며 언제든지 다른 상황을 가정해서 썰을 풀 수 있고 저는 하토라의 설정과 썰을 듣고 보고싶은 장면을 작성한 것이며 (횡설수설 변명하기) 로그를 쓰는 것은 정말로 제가 보고싶어서 쓰는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주시면 좋겠어요 그냥... 같이 좋아해주시면 저도 좋고 그런 거니까요 ><);;!!

*






 비가 오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줄기차게 내리던 빗줄기는 이제 한결 약해져있었지만, 그럼에도 끈기있게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온 공기에 습기가 가득했다. 성체가 되었으나 아직 어린 용은 그러한 환경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애초에 비를 좋아하던 용이었으니 성체가 되었다고 해도 개인의 호불호가 변했을 리 없었다. 별 일 없을 거라며 비 오는 날씨 탓에 더 화려한 장미 모양이 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리는 무녀를 뒤로 하고, 흰 종이우산을 손에 든 용은 일찌감치 신사 바깥으로 나왔다. 늘 가던 신령의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금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가벼웠다. 


 용은 지상에 내려온 뒤 끊임없이 제 사랑의 곁을 맴돌았다. 그에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는 멀게, 허나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깝게. 덕분에 그가 보살피는 마을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조금씩 친해지기까지 했다. 용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았고, 인간의 생활에 도움이 될 사소한 능력도 다양했으니까. 우물물을 깨끗하게 해주거나, 새 물길을 파는 일은 성룡에게 있어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오늘은 비가 오니, 그는 오늘도 집에 머물까. 그럼 나는 마을의 작물이 무너진 것이 없을까 비에 산이 쓸려가지는 않을까 마을을 조금만 살펴보고 돌아갈까...... 용은 가벼이 눈을 깜박였다. 높이 올려묶은 머리카락 절반과 달리 길게 늘어뜨린 절반의 머리카락이 허리춤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땋은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용은 가벼이 콧노래를 불렀다. 호흡 한 줌마다 습기가 가득 차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 가득 만족스러웠다. 


 멀리서나마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용은 작은 아쉬움을 삼켰다. 그래도 너무 욕심을 내면 안 되겠지. 용은 느리게 마음을 단념하며 몸을 돌렸다. 그 집 있는 방향이라도 보겠다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마주한 시선에 그대로 얼어버린 용이 무심코 한 발자국 물러섰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한가득 자색이 들어찼다. 놀란 눈의 하토라와 시선이 마주친 루카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너무 놀라 뿔이 튀어나오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숨을 들이삼켰다.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기척을 짚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비가 온다고 들떠 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제 등 뒤에 하토라가 설 때까지도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자기 자신을 탓하며 용은 옷자락으로 제 얼굴을 조금 감췄다. 안 봐도 지금의 저가 꼴사나운 모양새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얼굴색부터 관리하기 힘들었다. 


 우산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고즈넉했다. 처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사랑의 모습에 루카는, 겉으로 티내지 않았으나 몹시도 긴장했다. 귓가가 불긋했고 뺨은 보기에 사랑스러울 정도로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빗소리보다도 커서 상대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작게 입을 달싹였다가 천천히 닫았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차마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쩔쩔매다가, 용은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날씨가, 좋구나."


 비 오는 날은 좋아하느냐? 초면의 상대에게 던지기에는 그다지 좋은 질문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을 앞에 두고 긴장한 어린 용이 건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대신 용은 곱게 웃었다. 처음 제 사랑에게 말을 붙여 본 기쁨이 걷잡을 수 없이 용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희고 고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긴 머리카락이 용이 웃으며 어깨를 살짝 들썩이는 움직임에 맞춰 작게 출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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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요괴AU 2

2018. 12. 1. 02:58 from others/Otohara Ruka




"괜찮으셔요, 왕자님?"
"그래, 심려치 않아도 괜찮다."


 어린 용은 엷게 웃었다. 마냥 상냥한 모양새였으나, 용의 주변을 맴돌던 시종들의 낯은 그 모양새를 볼수록 가라앉았다. 발갛게 열이 올라 앓아 누운 상태로 괜찮다 말해봐야 걱정만 살 뿐이었다. 그 역시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왕자는 손짓으로 시종들을 모조리 물려버렸다. 곁에 앉아서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어 봐야 속만 상할 뿐이었다. 소리없이 바깥으로 헤엄쳐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곧 방에는 그 홀로 남았다. 용왕의 아들, 작고 어린 용은 비단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머리가 뜨거웠고,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때마다 몸이 아팠다. 

 다른 자들은 어린 용이 호기심으로 뭍에 나갔다가 돌아와 그대로 앓아 침상에 누워버린 탓에, 땅의 병을 옮아 온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다른 이유를 병의 이유로 짚고 있었다. 한 번 몸을 뒤척이며 어린 용은 길게 한 번 숨을 뱉었다. 


 여의주로 세상을 돌려보던 중 첫눈에 반한 자를 찾아 바다의 용은 땅을 밟았다. 잠시 땅의 지리를 몰라 헤매기는 했지만, 다행히 마음씨 좋은─정확히는 어린 용이 땅에 내려앉아 생기는 온갖 사건사고를 질색하는─강한 무녀가 용을 주워 그 자에게까지 안내해주었다. 인간 나이로 고작 다섯, 많이 봐야 여덟 살 먹은 것처럼 보이는 어린 아이였기에 용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그저 속절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무녀의 옷자락 뒤에 숨어 발갛게 뺨을 붉히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만나서, 대화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짧은 말을 나누고 어린 용은 그대로 바다로 돌아왔다. 땅에서 더 할 일도 없었을 뿐더러 만나는 것 하나만 원하고 땅에 와서 바라는 바를 이루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무녀와 그리 약속하기도 하였으니까. 그리고 용궁에 되돌아온 용은 그대로 쓰러져 열이 올랐다. 흰 뺨에 얼룩덜룩한 열점이 생기고 체온이 들끓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 몸이 아팠다. 어린 왕자가 돌아와 짧게 안심한 용궁은 그대로 뒤집어졌다. 

 바다에서 가장 솜씨 좋은 의원을 모시겠다며 주변인들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영특한 어린 용은 사실 제 병명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첫사랑에 빠져 버렸다. 만나지 않았다면 시작되지 않았겠으나, 찰나의 가슴 설렘을 이기지 못하고 육지에 나와 사랑을 마주한 용은 그대로 마음을 빼앗겼다. 


 어째서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가치가 없었다. 왜 사랑에 빠졌느냐는 물음만큼 어리석은 게 어디 있을까. 어린 용은 상대를 마주한 순간 자신이 세상에 발을 딛고 태어나 숨을 뱉는 이유가 상대임을 확신했거늘. 그로 인해 늘 물빛이던 세상이 화려하게 색을 입고,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귀를 울렸다. 사랑이 용의 몸에 가득 차올라 그를 새롭게 만들었다. 수많은 생명이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용을 조금 더 자비롭게 만들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조금 더 알고 싶고, 조금 더 곁에 있고 싶고, 조금 더 닿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서기에 걸맞은 모습이 되고 싶었다. 

 그 작은 바람. 상대가 저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사랑해준다면 가슴 저미게 기쁘겠지만 어찌 사랑이 상대에게 제 욕심을 강요하는 감정이 될까. 사랑이라는 작은 불씨는 용의 안에 피어올라 그를 온통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저 눈길 한 줌, 시선 한 뼘 더 받고 싶다는 욕심만이,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상대를 존중하여 오롯하게 상대의 행복을 바라게 만들었다. 저를 사랑하게 만들고 저를 행복하게 만드는 그가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사랑에 앓아 누운 용은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용은 본디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며 아주 느리게 성장하지만, 어떠한 계기가 있다면 급격하게 자라는 경우가 있었다. 어린 용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온몸을 찢어놓는 듯한 통증과 열이 소년의 이성을 얼룩지게 만들었음에도 그 감정 한 점 퇴색되지 않고 빛나서 소년의 시야를 열어 주었다. 소년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났고, 깨어날 때마다 그의 곁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어느 때에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의원이었고, 어느 때에는 걱정 어린 얼굴로 제 손을 붙잡은 누이였고, 또 어느 때에는...... 그렇게 몇 번이고 통증과 열에 혼절하였다가 깨어난 어느 날. 용은 제 몸의 통증이 날씨 개이듯 깨끗하게 가신 것을 깨달았다. 뜨인 눈이 명쾌하고 호흡이 달았다. 


 뻗은 손은 이전과는 크기부터 달랐다. 희고 번듯한 성체의 손이 용의 시야에 들어찼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눈높이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어느 틈에 갈아입혀진 옷의 품조차 큼지막했다. 제 얼굴을 두어 번 짚어보다가 여의주로 제 모습을 보고 청년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둥그스름한 얼굴과 커다란 눈. 자그마한 손발을 가지고 있던 어린 소년은 오간데 없고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길쭉하고 잘 생긴 청년만이 남아 있었다. 인간의 의태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다시 용의 현현으로 돌아가도 크기가 엄청나게 자라 있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다. 


 사랑의 곁에 있기에 가장 걸맞다 생각되는 모습으로 자라 버린 용은 가만 눈을 깜박이며 저를 응시했다. 어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으나 결국 마음이 이끄는 곳은 하나였기에 결론 역시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용은 옷차림을 갖추고 방문을 열었다. 아직 성인식도 치루지 않았으나 급격히 자라버린 젊은 용이 해야 할 일은 이제 하나였으니까. 




 * 


 이 뒤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명언을 실천하고 다시 뭍으로 올라가 바라네 신사에서 신세지며 가끔 날씨도 조종하고 하토라 곁에 기웃거리면서 열심히 먹을 것도 가져다 나르고 아무튼 열심히 짝사랑하지 않을까요 ><)9 저는... 동양풍 사랑하는 사람... 요괴AU... 너무 맛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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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AU

2018. 11. 29. 22:13 from others/Otohara Ruka




 무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일주일 전부터 동쪽 하늘이 심상치않다 직감하였던 무녀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꼴에 낮게 혀를 찼다. 이제 동쪽 바다는 영력 없는 이가 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하늘이 시커멓고 마른 번개가 쳤다. 천둥 울음 소리와 거친 파도 덕분에 뱃일하는 사람들도 바다 근처에 얼씬도 못 하는 모양새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녀는 바다가 왜 저리 심상치 않은지 이유도 알고 있었다. 요괴며 작은 신선이며 너나할것없이 수군거리는 게 귀에 생생하게 잘도 들렸다. 동해 바다 막내 아드님이 사라지셨다더라.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작은 용이라더라. 재능있고 총명하신 분이신지라 다음 대 용왕이 되실 귀한 몸이시라더라. 

 아무튼 용만큼 손이 많이 가는 족속도 드물었다. 자존심 높고 고고한 주제에 사고는 규모가 컸다. 무녀는 번거롭다며 혀를 몇 번이고 찼지만 그럼에도 별 수 없이 움직였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바다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호전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바다가 혼란하기 시작하며 여기저기 튀어나와 활개칠 성격 고약한 요괴들이나 악령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손을 쓰는 게 나았다. 무녀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사흘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못 찾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린 용의 존재감은 거대했다. 분명 마을에 발을 딛기 직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감춰져있던 기척이었다. 아직 백 살도 먹지 않아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용이라고 했건만. 확실히 잠재능력 하나만큼은 봐줄만했다. 무녀는 사뿐사뿐 걸어 어린 용의 앞에 섰다. 

 당연히 곱게 자랐을 용은 어느 골목길 담벼락 밑에 들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화려한 옷자락 끝은 조금 때가 묻어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그럭저럭 체면 차릴 정도로는 깨끗했다. 무녀는 티내지 않았지만 어린 용의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용은 의태에 서툴러 비늘이 그대로 보이거나 지느러미를 드러내거나 뿔을 숨기지 못하고는 했다. 이제 겨우 쉰 살 가까이 된 어리디 어린 용이니 몸의 반신이 의태하지 못한 용의 모습일것이라 예상했건만, 예상 외로 어린 용은 완벽한 어린 인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게 보면 다섯에서 많게 보면 여덟이나 되었을까. 가출한 지 거의 이주가 되었는데도 필사적으로 저를 찾고 있을 신하들에게서 몸을 숨기고 저를 잡아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릴 요괴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능력은 확실히 있었다. 재능있는 용이었다. 무녀가 부러 슬쩍 기척을 흘리자마자 용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희고 푸른 시선 사이로 가느다란 푸른 동공이 얇게 저며들었다. 뾰족하게 경계를 세우는 어린 용을 앞에 두고 무녀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말해야 순순히 이 용을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이었다.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 자로구나. 나를 찾으러 왔느냐?"


 어라. 무녀가 눈을 둥글게 떴다. 어린 용이 먼저 말을 붙여올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녀는 느리게 고개를 한 번 기울기는 했지만, 순순히 답했다. 


"맞아. 더 이상 바다가 소란스러워지면 지상도 이리저리 번거로우니까."

"내가 지금 많은 생명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건 안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아네? 무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면 돌아가야지. 이어서도 생각했지만 눈앞의 용은 무녀의 반토막이나 올까 싶을 만큼 작은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말이 바깥으로 튀어나가지는 않았다. 도리어 용의 입에서 상식적인 말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했다. 한참 어린 모양새라 목소리조차도 앳되어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른스러운 말투와 어린아이 목소리의 갭이 뚝뚝 떨어졌지만. 


"나도 내가 나온 목적만 달성한다면 바다로 돌아갈 생각이니 너무 심려치 말아라."

"목표가 뭔데?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한데."

"나를 도와 줄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라면."


 무녀가 턱짓으로 재촉했고, 어린 용은 고민했다. 입가를 가리고 곰곰 생각에 잠긴 용이었지만, 대답은 금방 나왔다. 용이 들고 있던 반짝이는 작은 구슬─여의주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푸르스름한 번개가 번쩍이는 구슬은 사뿐히 날아 무녀의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용의 푸른 눈과 꼭 닮은 여의주는 영기를 머금고 번개와 함께 빛나고 있었다. 


"드물게 강한 인간아, 네 말을 믿어 보마. 나는 만나고 싶은 이가 있어 뭍에 올라왔다."

"정인?"
"그, 그런 건 아니다."


 새하얀 용의 뺨에 불그스름한 핏기가 돌았다. 아니긴... 무녀는 용의 감정이 눈에 선했다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린 용은 제 수줍음에 못이겨 이것저것 말을 터트렸다. 홍시마냥 점점 익어가는 뺨은 용을 마치 인간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정말 아니다. 나는 그저, 용궁에서 마을을 구경하다가 본 이가 어여뻐서. 그저, 그래. 한 번 대화를 해 보고 싶어서......"

"그래그래, 한눈에 반했다고."

"그러니까 그런 건 아니라니까!"


 여의주에서 짜릿하게 번개가 튀어올랐지만, 주인의 수줍음을 반영한 것인지 정전기에 비슷한 수준의 전력이었다. 그래그래, 알았어. 무녀가 두 손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치렁치렁한 비단 소매를 제대로 정돈하고 옷에 묻은 흙먼지까지 털어낸 어린 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녀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골이 난 모양새였으나,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어려서 그런가, 이제껏 무녀가 보아온 그 어떤 용보다 제일 상식적인 용이었다. 무녀는 용을 덥석 안아들었다. 내내 낯선 인간의 다리로 걸어야만 했던 용은 지쳐 있던 것인지, 무녀의 손길을 딱히 뿌리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만나고 싶다는 존재는 어떻게 생겼는데?"

"심해를 닮은 짙은 흑빛 머리카락에, 제비꽃보다 고운 자색 눈동자를 하고 있다. 피부는 희고, 키는 크고. 눈매가 날카롭다."

"음~. 뭐 아주 흔하진 않아도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사내의 외형을 하고 있다. 이 근처에 사는 것으로 보았는데."

"어."


 어...... 무녀는 잠시 제 품에 안겨 눈을 둥글게 뜬 용을 응시했다. 어...... 그리고 잠시 허공을 보았다. 네가 말하는 게 누군지 어쩐지 나 좀 알 것 같다. 용을 품에 끼고 무녀는 터벅터벅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더냐? 아무것도 모르는 용은 기쁘게 웃기만 했다.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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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