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둥그런 녹빛 눈이 제 파트너를 샅샅히 살폈다. 디지털 세계로 넘어온 뒤로 크랩몬은 내내 루카를 신경쓰고 있었다. 어딘지 이상한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가 이상한지 꼬집어낼 수가 없었다. 인간과 디지몬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가 소년으로 성장하는 시간의 공백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루카는 지금 분명 이상했다. 크랩몬의 녹색 눈동자가 슬프게 가라앉았다. 상냥하고 다정한 성정의 소년이 이곳으로 넘어오면서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 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린엔젤몬의 죽음도, 황폐해진 디지털 월드도 모두 소년에게는 상처일 터였다.
본래라면, 그러니까...... 상황이 조금만 더 평화로웠다면 소년은 그것을 천천히 치유하고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했다. 부러지지 않는 정신력과 견고한 마음은 소년을 강하게 만들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었다. 힘든 일만 겹쳐서 일어나고 그것을 치료할 시간과 조건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홀로 나앉은 소년은 제 상처 하나 핥지 못하고 주변만 살피고 있었다.
"루카, 뺨이 조금 붉은 것 같은데......"
"그래? 음...... 괜찮은데."
크랩몬의 속삭임에 루카가 제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가 때며 웃었다. 미소는 언제나와 같이 평온했지만 크랩몬은 마음 한구석을 선득하게 만드는 불안을 차마 떨치지 못했다. 소년은 시선을 돌려 황폐한 디지털 월드를 멍하니 둘러보았다. 그 시선이 일견 비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크랩몬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영리한 소년은 모든 계산을 끝마친 상태였다. 크랩몬이 돌핀몬이나 고래몬으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 강철의 껍질을 가진 크랩몬은 루카의 체온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계산. 이마에 손등이 닿은 순간 알았다. 약하게 열이 나고 있었다. 하기야 여기 온 직후부터 계속 머리가 아팠으니. 얇은 옷차림과 추운 날씨 탓도 아예 없진 않겠지만, 모든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두통은 뇌를 갉아먹는 것처럼 조금씩 이어졌다. 젤리로 허기를 채우고 진통제를 씹어 삼키는 것은 거의 몇 시간 간격. 소년의 몸은 슬슬 한계에 다가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건 정신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건 예전부터 그랬고, 먹지 못하기 시작한 건 아사쿠사에 도착한 뒤부터 그랬었다. 둘 다 익숙했기에 충분히 다스리면서 조금씩 호전시킬 수 있었다. 허나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여럿이 있었는데, 첫째로 소년의 눈앞에서 죽어버린 마린엔젤몬. 마음을 주었던 좋아하는 벗의 죽음이었고 또 하나는 이 황폐해진 디지털 월드의 모습이었다. 이곳을 사랑했던 마음, 이곳의 디지몬들이 소중했던 마음이 전부 찢겨 내려앉았다. 그 동안 할 수 있던 일이 없었다는 무력감, 숨이 막히는 슬픔, 괴로움, 안타까움...... 애정이 칼날이 되어 폐부를 찔렀다. 결정적으로 소년의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소년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년은 휴식을 취할 때 철저하게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강박이 존재했으니 당연히 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가장 어린 소년을 누구나 신경써 준다는 말은, 소년은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니. 소년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첨예하게 날을 세우고 소년을 찌르고 있었다.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마음과 힘든 건 저 하나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크랩몬이나 하토라에게 의지하지도 않았으니 소년의 정신은 슬슬 한계였다.
피곤해...... 머리가 아파. 그림처럼 고운 얼굴로 소년은 옅게 피로를 드러냈다가 감췄다. 내색하지 않는 법. 루카가 6년 사이에 가장 완벽하게 익혀 온 것은 바로 그것이었으니.
"크랩몬, 조금만 더 둘러보고 돌아가자. 저 쪽은...... 우리가 축제 때 놀았던 곳 같은데. 저기만 보고 갈까?"
"응......."
크랩몬의 집게발을 붙잡으며 소년이 미소지었다. 늘 그렇듯 평온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