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깨진 날

2018. 11. 17. 03:33 from others/Otohara Ruka




"있지 루카. 루카는 집에 안 가?"
"응?"
"바로 저기 있는 걸."


  크랩몬의 집게가 천장을 가리켰다. 확실히 소년의 집은 이 신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신사에 서면 지붕 끄트머리가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는 제 집 근처를 맴돌기만 할 뿐 집에 한 발자국도 들어서지 않았다. 도리어 피하듯 그 주변만 서성였다. 크랩몬은 그런 루카를 꽤 흥미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제 오랜 벗은 분명 인간의 시간으로 6년 전까지만 해도 뭘 하든 누나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던, 가족을 더없이 사랑하던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분명 퇴색되지 않았다. 집을 응시하는 루카의 눈은 여전히 다정했다. 집을 맴도는 이유도 알았다. 혹시 입구에서 빠져나온 디지몬이 집을 습격하지 않을까, 제 소중한 가족들이 다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집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주제에 그저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이 문 앞에서 떠나지 않는 건 입구 앞에 서 있는 이상 다른 디지몬이 집을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일 터이고.

 소년의 희고 푸른 눈동자를 가만 응시하는 파트너의 시선에, 루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음. 곤란한 듯 목소리를 흘린 루카가 작게 웃었다. 


"알고 싶어?"

"응."

"그럼 크랩몬한테는 얘기해 줄까?"


 이리 와. 루카가 자리에 앉아 팔을 뻗자 크랩몬은 망설임없이 소년의 품에 쏙 들어와 자리잡았다. 크랩몬의 집게발을 겨우 끌어안던 작은 아이는 이제 크랩몬을 통째로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제 디지몬을 품에 끌어안은 소년이 문 앞에서 자리를 비켜 구석에 틀어박혔다. 어둠 속에 슬쩍 숨어서 타인의 눈에 닿지 않을 정도로. 꽤 요령좋은 은신이었다. 이곳에 남은 사람은 대부분 잠에 빠졌고, 누구도 이 쪽을 보지 않고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에야 루카는 작게, 조근조근 말을 시작했다. 


"우리 가족들 얘기 해준 거 기억 나, 크랩몬?"

"응. 아즈사랑 히오리랑. 아빠랑 엄마랑 할아버지."

"정답.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히오리! 그리고 할아버지랑 아즈사랑 엄마랑 아빠."


 그것도 정답. 크랩몬이 언급한 순서는 8살의 루카의 세상을 이루는 사람들이 소중한 정도였다. 제일 나이터울 적은 누이가 제일 중했고, 늘 저를 챙기고 사랑하던 할아버지도 그 못지 않게 중했다. 여덟 살 더 연상의 큰 누나도 좋아했고 엄마도 좋아했고. 아빠는, 음. 글쎄...... 아비가 막내아들에게 관심가지는 딱 그 정도만 소중했다. 어린 루카는 지금보다 더 칼 같은 면이 있었으니까. 여하튼 루카에게 있어서 가족은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고, 크랩몬과 다른 선택받은 아이들과 만난 뒤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었다. 누나들 정말 좋아. 할아버지 너무 좋아. 소년의 입에 진작부터 붙어 있던 말이었다. 소년의 세상의 대부분은 가족을 향한 사랑과 그로 인해 돌려받는 사랑으로 견고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관계가 삐걱이던 것은, 아직 어린 소년만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성장 내내 있어 왔던 일이었다. 그게 펑 하고 터진 건 초등학교의 학년이 막 바뀌어가던 5학년. 소년이 열 두 살. 루카의 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누이가 가고 싶어하는 학교와 집안이 원하던 학교가 달랐던 것. 사소한 원인은 그것이었다.


"할아버지랑 집안 어른들은 누나가 집 근처의 평범한 학교로 가서 공부하다가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걸 원했는데, 누나는 그걸 엄청 싫어했어. 덕분에 크게 싸움이 났지."

"싸움?"
"나는 그 때 아직 어려서, 다들 있는 방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엿듣고 있던 수준이었지만......"


 가끔은 꿈에서도 나오는 그 시기가 눈앞에 선연했다. 늘 상냥했던 누이의 목소리가 문밖을 넘은 것을 소년은 그 때 처음 들었었다. 어째서 루카만! 창호지를 뚫고 들리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알아요! 루카는 천재죠! 루카만큼 머리 좋은 아이를 본 적이 없어요! 공부도! 운동도! 재능있는 아이니까! 착하고 상냥하고. 심지어 남자아이기까지 하니까 뭐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어째서 루카만... 어째서!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슬픈 목소리에 담긴 원망이 고스란히 날아와 몸에 박히는 것 같았으니까. 차라리 자리를 피했으면 좋았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어 있던 루카는 결국 문을 열고 나오는 제 누이와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그 때 누나가 날 보는 눈을 보고 깨달았어. 더 이상 나는 누나의 제일 사랑하는 동생으로 있을 수 없구나...... 누나는 나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만큼 내가 원망스럽고 싫은 거구나."

"어째서? 루카가 잘못한 건 없잖아."

"직접적으로 내가 잘못한 건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에 대한 감정이 꼭 직접적인 무언가가 없어도 변할 수 있는 거잖아. 소년이 작게 속삭였다. 크랩몬은 엷게 미간을 좁혔다. 크랩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잘 모르겠어, 루카."

"음~ 하긴. 크랩몬이 알기에는 조금 힘드려나. 그냥 그런 일이 있어서 누나랑 사이가 좀 안 좋아졌어. 내가 누나 편만 드니까 서운하셨는지 할아버지도 나한테 화가 좀 나셨고. 하지만 할아버지랑 누나 사이가 제일 최악이지...... 집 분위기도 많이 어두워졌고. 아니, 최악은 둘 다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도 못 잡는 나려나. 아무튼 그래서 집에 들어가는 게 껄끄러워."

"그래서 하토라네 집에서 자주 머물렀던 거구나."

"응. 하토라 형한테는 그 때부터 신세지고 있었으니까."


소년이 크랩몬에게 머리를 기댔다. 누이의 그 시선. 슬픔과 원망과 미움. 그 순간만큼은 애정 한 톨 찾아볼 수 없던 눈. 처음 보는 그 시선에 사랑으로 가득 차 단단하던 소년의 세계는 안쪽부터 깨져서 완전히 박살이 났었다. 산산조각난 소년이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버린 것은 예정된 절차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와봤자 갈 곳이라고는 없었지만. 


"갈 곳, 없었어?"
"없었지. 호타루 형은 저 멀리 교토에 있었고, 이다 누나는...... '누나'는, 무서웠어."


 연상의 누이에게 상처받고 세계가 부서진 상태의 소년에게 있어서 또다른 누이와 만난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였다. 한 번 더 거절당하면...... 하나의 트라우마에 가까웠다. 그럴 리 없다는 말은 무용했다. 히오리에게 그런 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루카에게 있어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었으니. 지금까지도 그 감정은 색을 바꾸고 범위를 넓혀 견고하게 소년의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완벽하고 반듯한 모습은 그 일환이나 다름없었다. 


"집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하토라 형밖에 없어서 찾아갔었어. 생각해 보면 진짜 민폐였겠다. 아무튼 형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나 좀 주워 줘, 하토라 형. 울고 있던 주제에 무표정하게 부탁해오는 어린 애를 보며 상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루카는 아직도 잘 몰랐다. 어쨌든 하토라는 루카를 주워서 챙겨 줬고, 루카는 얌전히 챙김받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하토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 지금에 이르면서 지금 같은 모습을 할 수 있었던 건 다른 형누나들의 도움이 컸다. 지금까지도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고 있던 사람들. 기억 속의 소중했던 선배들...... 소년이 사랑하는 사람들. 새 세계를 재구축하는 데에 사용된 마음들. 


"이젠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계속 신세질 수는 없으니까. 깔끔하게 웃는 얼굴은 사랑스러웠지만, 크랩몬은 영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계속 루카 옆에 있을 거야? 그럼, 물론이지. 크랩몬이 날 어디든지 데려다 줄 수 있다고 말했잖아. 계속 같이 있어 줘. 크랩몬은 소년의 솔직한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 응. 


"워터 젤리만 먹고 있으면서."

"그건 좀 봐 줘. 그게 제일 먹기 편하단 말이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으응...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은 걸."

"아무튼 루카는 내가 없으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아냐, 그렇네. 응. 크랩몬이 없으면 안 돼."


 그럼 날 조금만 가려 줘...... 조금만 잘게, 크랩몬...... 소년의 디지바이스가 작게 빛남과 동시에 작은 디지몬은 큼직한 돌고래가 되었다. 제 파트너를 충분히 가려줄 수 있을 정도로 큼지막한 디지몬으로. 파트너가 제게 뺨을 부벼도 흰 얼굴에 상처를 내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몸체로. 돌핀몬은 아직 루카가 다 이야기해주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한 것은 숨겨 두기로 마음먹었다. 내일이면 디지털 월드로 떠나고, 그곳은 분명 아주 위험할 테니까. 

 그러니까 루카, 더 많은 얘기는 돌아와서 하자. 같이 여행을 하면서 하는 거야. 돌핀몬이 파트너에게 작게 뺨을 대었다. 아주 작게 숨을 뱉는 파트너의 온기는, 6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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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