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너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인 건 알겠어. 사람마다의 가치는 다 다르니까."
"다만 그 뜻에 내가 동조하지 못할 뿐."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절대 살아남지 못해."
"살아남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누가 알아주는 건데?"
당신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건가요? 소녀는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긴장감에 무심코 어깨를 굳혔다. 평소에도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화가 난 녹턴 로제르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 홀로 진지했던 설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났지만, 녹턴은 이제까지 말다툼에서 가라앉은 적이 없었다. 도리어 지나치게 가벼워서 싸움인지 뭔지도 모를 만큼 둥실둥실 분위기를 올려 버리고는 했었지. 소녀는 도통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녹턴에게 늘 화를 냈었지만, 기분이 상해서인지 정확한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 영문 모를 이유로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녹턴은 평소와 달라서 조금, 낯설었다.
어쩌면 그가 무서운 것일까? 소녀는 한 가지 의문을 내놓았다가 그 즉시 부정했다. 녹턴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가? 짧은 시간 작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데굴데굴 굴렀다가 가장 그럴듯한 답이 도출되었다. 그가 진지하게 대응해 주는 것은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학창시절 전부를 통틀어보아도 처음이었고, 즉 그녀는 거진 처음으로 동등한 감정 소모 위에서 녹턴과 갈등을 겪고 있었으니까. 처음 겪는 일은 무엇이든 무섭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 정을 준 사람과 이런 말다툼을 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람은 언제나, 처음 겪는 일이 싫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 쉽게 깨진다. 경험해보지 못한 서투른 행동은 늘 후회를 부른다. 지금 이 싸움도 분명 미래에 후회로 남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마른 침 사이 씁쓸한 공포를 섞어 삼켜넣은 람은 티 내지 않고 똑바로 내내 녹턴을 응시했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는 건 람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바다 색 눈동자가 똑바로 색 다른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색이 허공에서 선명하게 겹쳤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소녀가 하는 청년은 무척이나 단편적이고, 함께한 시간은 참으로 보잘것없어서. 그리하여 소녀는 상대의 아주 작은 일부밖에 모르는지라 람은 그를 대단히 편향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말끝에 조금씩 날이 서 있고, 표현은 직설적이어서 사람을 가끔 화나게 만들고. 엄청난 물질만능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음악가. 아마도 좋은 집안의 도련님.
람 역시도 지금은 좋은 집에 사는 외동딸이고, 표현이 직설적인지라 종종 타인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나, 소녀에게 황금이란 지나가는 사람이 다가와 건네주는 호의보다도 가치 없었다. 작은 차이일지도 모르나 그로 파생되는 수많은 차이점은 두 사람을 양극단까지 밀어냈다. 눈앞에 서 있는 수려한 청년이 결국 저와 심정적으로 무척이나 먼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소녀는 아주 느지막이, 깨달았다. 소녀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이 사람을 모르겠다. 내 모든 말이 당신을 조금도 이해시키지 못할 가치임을 알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당신의 그 굳건한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고집으로 뭉쳐진 다른 색 두 눈동자가 꼭 저와 같이 빛나고 있었으니. 아마 당신도 스물 두 살의 인생을 쌓아올려 굳힌 마음이겠지. 그녀가 열 여덟 살의 인생을 쌓아 올려 굳혀낸 마음이 있듯.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람이 선택할 일은 당연히 하나이지 않은가? 그녀는 언제나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대에 실망했다가, 끝내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런 주제에 늘 다시 한번 기꺼이 기대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에 그녀는 늘 사람이 조금 더 성실해지기를, 조금 더 도덕적이기를 바라며 타인을 붙잡지 않았는가. 상대가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정말이지 부차적인 문제였다. 소녀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벼워졌다. 지금 눈앞의 사람이 평소보다 더 제 말을 잘 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상황은, 낙관적인 수준의 도덕과 마음을 외치던 상황과 온전히 다르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하고 있는 말이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 말아요가 아니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으니 말해보라 외치는 것이다. 많이 해 본 것은 그녀의 장기였다. 끊임없는 도전은 그녀의 장기였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배우고 파고드는 것 역시도, 그녀의 장기였다. 소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입을 열었다.
"나는 녹턴이 좋은 집안 도련님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녹턴의 말을 잘 모르겠네요. 녹턴은 언제나 돈이 있는 사람이었잖아요. 왜 그렇게 돈의 가치를 높게 쳐주는 건가요? 이유라도 있나요?"
그래, 이것 역시도 모르겠다. 당신은 늘 있는 측의 사람이었지 않은가? 돈이 없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해 쓰러진 사람을 가까이에서 볼 환경조차 되었을까? 아니면 당신 역시도 그러한 절박함을 겪어 보았는가? 풍족했던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절박한 것처럼 풍족함을 탐하는 걸까? 당신이 살아오고 쌓아왔던 인생의 일부에 손을 올렸다. 알려줄 수 없느냐 청했다.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본디 그녀는 늘 그랬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니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다.
"만약 나였다면...... 그래요, 만약 내가 돈이 없어 절대 살아남지 못할 사람이었다면...... "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었더라도 그녀는 꾸역꾸역 살았겠지. 지금보다 힘들고, 지금보다 괴롭고, 지금보다 훨씬 자존심과 인생에 상처를 입더라도 어떻게든 살았을 거다. 하지만 거기까지밖에 모르겠다. 그녀의 삶이 풍족하진 못하더라도 빈곤하지도 않았기에 그보다 못한 상황에 처한 제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감히 처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상상해 넣어보더라도 그건 그 일을 겪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이 그 상황 앞에서 그러지 않을 것이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녹턴과 비슷하게 사고했을지도 모르죠."
너무 힘들어서, 마음의 힘 같은 건 믿지도 않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어서 살아남지 못하는 람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녹턴의 앞에 서 있는 람은 이렇게 자랐기에, 끝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생존은 꼭 이런 방식이었기에. 그녀의 머릿속에 가치를 가지고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든 것들은 애정으로 이루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살아남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받았던 사람이 기억해요. 결국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건 감정이에요. 남겨진 마음을 기억하는 것도 결국 마음이고 사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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