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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29 생존의 이야기
  2. 2020.12.28 가치의 이야기
  3. 2020.08.24 어느 날 (+ 뮤, 세렌)
  4. 2019.12.16 폭군AU 2
  5. 2019.12.15 폭군AU
  6. 2019.02.24 vs 회색체육관전
  7. 2018.11.15 첫사랑

생존의 이야기

2020. 12. 29. 00:54 from pokemon/Ram

youtu.be/IpixfypCJ7M

 

 

 

"그래, 너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인 건 알겠어. 사람마다의 가치는 다 다르니까."

"다만 그 뜻에 내가 동조하지 못할 뿐."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절대 살아남지 못해."

"살아남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누가 알아주는 건데?"

 

 

 

  당신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건가요? 소녀는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긴장감에 무심코 어깨를 굳혔다. 평소에도 자주 싸우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화가 난 녹턴 로제르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 홀로 진지했던 설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났지만, 녹턴은 이제까지 말다툼에서 가라앉은 적이 없었다. 도리어 지나치게 가벼워서 싸움인지 뭔지도 모를 만큼 둥실둥실 분위기를 올려 버리고는 했었지. 소녀는 도통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녹턴에게 늘 화를 냈었지만, 기분이 상해서인지 정확한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 영문 모를 이유로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녹턴은 평소와 달라서 조금, 낯설었다. 

  어쩌면 그가 무서운 것일까? 소녀는 한 가지 의문을 내놓았다가 그 즉시 부정했다. 녹턴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가? 짧은 시간 작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데굴데굴 굴렀다가 가장 그럴듯한 답이 도출되었다. 그가 진지하게 대응해 주는 것은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학창시절 전부를 통틀어보아도 처음이었고, 즉 그녀는 거진 처음으로 동등한 감정 소모 위에서 녹턴과 갈등을 겪고 있었으니까. 처음 겪는 일은 무엇이든 무섭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 정을 준 사람과 이런 말다툼을 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람은 언제나, 처음 겪는 일이 싫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 쉽게 깨진다. 경험해보지 못한 서투른 행동은 늘 후회를 부른다. 지금 이 싸움도 분명 미래에 후회로 남을지 모르지. 그렇지만... 마른 침 사이 씁쓸한 공포를 섞어 삼켜넣은 람은 티 내지 않고 똑바로 내내 녹턴을 응시했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는 건 람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바다 색 눈동자가 똑바로 색 다른 두 눈동자를 응시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색이 허공에서 선명하게 겹쳤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는 걸까. 소녀가 하는 청년은 무척이나 단편적이고, 함께한 시간은 참으로 보잘것없어서. 그리하여 소녀는 상대의 아주 작은 일부밖에 모르는지라 람은 그를 대단히 편향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말끝에 조금씩 날이 서 있고, 표현은 직설적이어서 사람을 가끔 화나게 만들고. 엄청난 물질만능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음악가. 아마도 좋은 집안의 도련님. 

  람 역시도 지금은 좋은 집에 사는 외동딸이고, 표현이 직설적인지라 종종 타인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나, 소녀에게 황금이란 지나가는 사람이 다가와 건네주는 호의보다도 가치 없었다. 작은 차이일지도 모르나 그로 파생되는 수많은 차이점은 두 사람을 양극단까지 밀어냈다. 눈앞에 서 있는 수려한 청년이 결국 저와 심정적으로 무척이나 먼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소녀는 아주 느지막이, 깨달았다. 소녀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이 사람을 모르겠다. 내 모든 말이 당신을 조금도 이해시키지 못할 가치임을 알았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당신의 그 굳건한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고집으로 뭉쳐진 다른 색 두 눈동자가 꼭 저와 같이 빛나고 있었으니. 아마 당신도 스물 두 살의 인생을 쌓아올려 굳힌 마음이겠지. 그녀가 열 여덟 살의 인생을 쌓아 올려 굳혀낸 마음이 있듯.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이 있으면 람이 선택할 일은 당연히 하나이지 않은가? 그녀는 언제나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대에 실망했다가, 끝내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런 주제에 늘 다시 한번 기꺼이 기대하는 사람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에 그녀는 늘 사람이 조금 더 성실해지기를, 조금 더 도덕적이기를 바라며 타인을 붙잡지 않았는가. 상대가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정말이지 부차적인 문제였다. 소녀의 마음이 그제야 조금 가벼워졌다. 지금 눈앞의 사람이 평소보다 더 제 말을 잘 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상황은, 낙관적인 수준의 도덕과 마음을 외치던 상황과 온전히 다르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하고 있는 말이 달라졌을 뿐이다. 하지 말아요가 아니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으니 말해보라 외치는 것이다. 많이 해 본 것은 그녀의 장기였다. 끊임없는 도전은 그녀의 장기였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배우고 파고드는 것 역시도, 그녀의 장기였다. 소녀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입을 열었다. 

 

"나는 녹턴이 좋은 집안 도련님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녹턴의 말을 잘 모르겠네요. 녹턴은 언제나 돈이 있는 사람이었잖아요. 왜 그렇게 돈의 가치를 높게 쳐주는 건가요? 이유라도 있나요?"

 

  그래, 이것 역시도 모르겠다. 당신은 늘 있는 측의 사람이었지 않은가? 돈이 없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해 쓰러진 사람을 가까이에서 볼 환경조차 되었을까? 아니면 당신 역시도 그러한 절박함을 겪어 보았는가? 풍족했던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절박한 것처럼 풍족함을 탐하는 걸까? 당신이 살아오고 쌓아왔던 인생의 일부에 손을 올렸다. 알려줄 수 없느냐 청했다.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본디 그녀는 늘 그랬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니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다. 

 

"만약 나였다면...... 그래요, 만약 내가 돈이 없어 절대 살아남지 못할 사람이었다면...... "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었더라도 그녀는 꾸역꾸역 살았겠지. 지금보다 힘들고, 지금보다 괴롭고, 지금보다 훨씬 자존심과 인생에 상처를 입더라도 어떻게든 살았을 거다. 하지만 거기까지밖에 모르겠다. 그녀의 삶이 풍족하진 못하더라도 빈곤하지도 않았기에 그보다 못한 상황에 처한 제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감히 처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상상해 넣어보더라도 그건 그 일을 겪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이 그 상황 앞에서 그러지 않을 것이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녹턴과 비슷하게 사고했을지도 모르죠."

 

  너무 힘들어서, 마음의 힘 같은 건 믿지도 않고, 도저히 일어설 수 없어서 살아남지 못하는 람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녹턴의 앞에 서 있는 람은 이렇게 자랐기에, 끝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생존은 꼭 이런 방식이었기에. 그녀의 머릿속에 가치를 가지고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든 것들은 애정으로 이루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살아남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마음을 받았던 사람이 기억해요. 결국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건 감정이에요. 남겨진 마음을 기억하는 것도 결국 마음이고 사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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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가치의 이야기

2020. 12. 28. 00:44 from pokemon/Ram

 

 

"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란 건 아니니까."

 

 

  그럼요, 알고 말고. 내가 어떻게 그걸 모르겠어요? 소녀는 무심코 입술을 달싹였다. 웃고 싶었던 것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소녀도 모른다. 가슴을 쓸고 내려가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두근두근 점점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등 뒤로 숨긴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며 최선을 다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소녀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타고나기를 뛰어나게 영리하지는 않은지라... 어쩌면 그 필사적인 모양새가 티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람은 눈을 한 번 도록 굴렸다. 제 앞에 서 있는 녹턴은 음악가답게 펵 예민했지만 그만큼 제 관심 없는 것에 무심하게 구는 경향도 있으니 어쩌면 어렵잖게 제 이상함을 숨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도 알아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장 먼저 그리 생각하며 소녀는 고개를 들어 녹턴을 올려다보았다.

 

  감히 한 끼 식사를 걱정할 정도로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제 삶이 비참했노라 말하지도 않겠다. 그녀는 그럭저럭 평범하게 행복했다.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나왔고 겨울에 얼어죽지 않을 만큼 미지근한 온기가 남은 이불 속에서 잘 수 있었다. 낡았지만 조심히 써서 물려입은 옷을 입고 기본적인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가끔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간식가게나 음반가게로 달음박질 칠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더군다나 믿을 수 없는 행운을 붙잡아 이제는 퍽 부잣집 아가씨 같은 차림새까지 할 수 있지 않은가. 언제 사라질 지 몰라 가끔 지금도 잠을 설치는 행운이지만, 그녀는 객관적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기에, 람이 마음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운이 좋았으니까. 자신의 시야에서 볼 수 있는 단편적인 그대로. 사람의 마음이 강하기를. 사람의 마음이 자비롭기를. 그리하여 누군가가 강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타인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 만큼 다정하기를. 람의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내가 바라니 남에게 내가 바라는 형태를 그대로 따라하는 초라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이 초라함을 손에 쥐고 나는 반드시 성공하여 대단해지겠노라 이를 악물었던 초라한 사람인데. 여기까지 해낸 마음의 원동력은 나의 이 보잘것없음인데. 붉은 머리 소녀는 다시 한 번 숨을 삼키고 제 앞이 청년을 찬찬히 응시했다. 창백한 금속같은 분홍색 머리카락, 색이 다른 두 가지 눈동자,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 길게 뻗은 아름다운 손가락. 귀하고 곱게 자란 것처럼 보이는 멀쑥한 청년. 화면 너머에서 동경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제 앞에 서 있는 그를. 

 

  당신의 말은 옳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마음이 더 중요하니 제 양심을 따르며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말하는 람은 가혹하다. 당신이 현실을 논하는 게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 하나 없음을 알고 있거늘 맨 처음 어처구니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던 건 하필 말한 사람이 당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피아노를 듣고 자랐기 때문이다. 당신의 피아노를 내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너무 뛰어난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신을 보고 무척이나 실망했으나 그럼에도 놓을 수 없어 늘 쫒아가게 만들 정도로. 소녀의 표정이 잠깐 이상해졌다. 기쁜 것도 같고, 아니 슬픈 것도 같고. 

  환상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목소리가 내게 말했지만 현실을 살던 나를 잠깐이나마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건 당신의 음악이었으니까. 

 

"나는 환상 속에서 살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가치를 강요하지도... 않아요. 돈이 절박한 사람에게 지금 내 말이 얼마나 못나게 들릴지도 알아요. 지금 내가 말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일 뿐이죠."

 

  소녀는 그제야 평소처럼 제 표정을 만들 수 있었다. 눈썹에 힘을 주고, 어쩌면 화가 난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절대로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것처럼 강한 표정. 

 

"하지만 나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금과 똑같이 생각할 거에요. 가장 귀한 건 마음이고, 결국 그게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어요."

 

  그리고 조금 토라진 것처럼 입을 비죽였다. 농담하듯, 조금은 부드럽게.

 

"......그리고 당연히 난 귀감이죠. 바보 녹턴 로제르. 바보."

 

 

 

 

 

 

 

  공미포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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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어느 날 (+ 뮤, 세렌)

2020. 8. 24. 22:50 from pokemon/Hwee

 

슬슬 병원 문을 닫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 볼까, 오늘 뮤가 온댔으니 저녁은 전골을 끓여 볼까. 고기가 넉넉하던가. 버섯은 좀 더 사야 하나. 아니지, 저녁은 먹고 왔을 지도 몰라. 그럼 간식? 전후가 만든 복숭아 잼 있으니까 타르트를 구워 달라고 할까나. 이런 맛있고 여유로운 생각을 하던 휘의 앞에 약속보다 조금 빨리 찾아온 반가운 친구가 마찬가지로 반가운 친구를 데리고 들어왔다. 저녁 재료만 조금 더 사면 되니 전혀 문제될 일 없는 반가운 방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모래 색 머리카락과 선명한 분홍 색 머리카락을 눈에 담았을 때 그는 무척이나 찬란하게 웃었다. 한 번 친구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 본 다음에 곧장 사그라든 미소였지만. 문제 : 그 또다른 반가운 친구가 손에 피를 철철 흘리며 들어왔을 때 느낀 소감을 구하시오. 10점짜리 대형 문제였다. 

 

휘는 앞이 어지럽고 속이 쓰렸다. 아, 이게 내가 한창 열 다섯 사하를 잃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친구들이 느꼈던 감정이려나. 휘는 다시 한 번 과거를 크게 반성했다. 제 몸뚱아리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흉터들을 못 본 척하며 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반갑다고 손 흔들고 있는 세렌의 등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욕망을 참아냈다. 그는 환자였으니까. 훌륭한 보호자 뮤를 화랑에게 맡긴 뒤 휘는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 청하! 상처 소독해 줘! 새아! 아무래도 꿰매야 할 것 같으니 바늘 소독! 수술도구 준비해 줘! 평화로운 저녁 조용하던 치료소가 작게 소란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뭐~. 그랬다는거지."

"그래서 손등을 다친거고?"

"살짝 긁힌거야."

"다섯바늘을 꿰맸는데?"

 

휘는 새초롬하게 세렌을 응시하며 말했다. 서글서글 웃으며 넘어가는 세렌을 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를 믿고 와 주는 탓에 인간용 의사 면허도 준비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휘의 명칭은 포켓몬 치료사였다. 지금 저에게 어색하게 팔을 맡기고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포푸니같은 포켓몬. 통증 혹은 혼란으로 공격적으로 변하는 포켓몬을 진정시켜 치료하는 게 휘의 일이었기에, 휘는 무리 없이 포푸니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야생 포켓몬들만큼 힘에 민감한 존재는 없으니 내 앞에 있는 게 나보다 강하다는 생각이 들면 얌전해지기 마련이었다. 휘의 여유로운 태도와 더불어 어지간한 야생 포켓몬들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강한 포켓몬들이 치료소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탓에, 처음에 아프고 겁먹어 절절매던 포켓몬들도 잠시 환경을 파악하면 퍽 얌전해지고는 했다. 물론 통증이 이성을 눌러버리면 그 때부터는 다른 조치가 필요하긴 하지만... 이 포푸니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포푸니의 팔에 붕대를 묶어주고 방긋 웃는 해피너스, 새아의 품에 넘겨 준 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본격적으로 친구들에게 몸을 돌렸다. 병원 문은 친구들을 마지막 손님으로 닫아 둔 채였다. 

 

"손이 피... 투성이여서 깜짝 놀랐어, 세렌..."

"미안, 뮤~. 모처럼의 정시 퇴근이였을텐데."

 

느긋한 대화를 주고받는 친구들을 보며 휘는 수술도구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치료는 끝났고 의료 전공자로서 무척이나 할 말은 많았지만 과거 제 행적도 있으니 아무튼 세렌에게 너무 많은 구박을 하기에도 뭐했다. 다치지 않는 게 제일이다만 어찌 되었든 반가운 얼굴들이 둘이나 와 줬다. 청년은 능청 떨듯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람 전공은 아닌데."

"그래도 휘가 제일 편한걸? 그치 뮤."

"맞아..."

 

너희들 덕분에 내가 의사 면허도 준비하잖아. 조금만 다치지 말고 참아 봐. 자꾸 이러면 나 무면허 진료로 잡혀 가. 너희만 봐주는 거라 너희가 입 다물고 있어서 안 잡혀 가는 거야. 휘가 두 손을 모아 수갑을 차는 시늉을 했다가 다시 씩 웃었다. 실제로 그는 약 한 달 뒤에 있을 의사 시험을 준비중이었다. 수 백 종류가 넘어가는 포켓몬에 비하면 인간은 딱 한 종뿐인지라 솔직히 말하자면 공부 분량은 인간 쪽이 훨씬 적고 편했다. 

알았다며 개구지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세렌과 엷게 웃어주는 뮤를 보며 휘가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집과 이어진 방향에서 아까부터 조금씩 좋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전후가 손님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주방으로 타박타박 걸어간 지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저녁은 먹었다면 간식이라도 먹고 가. 아직 시간 있지?"

 

없으면 만들자. 다들 할 말이 많다고. 늦으면 자고 가. 너희 등 뉘일 자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순간이동도 있고 공중날기도 있으니까 출근 걱정 말고. 응? 어린 시절 친구들의 앞에서만 나오는, 조금 어리광처럼 조르는 휘의 말에 뮤와 세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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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폭군AU 2

2019. 12. 16. 23:32 from pokemon/Hwee

 

 모든 존귀한 빛 위에서 태어난 자는 그 모든 경외를 마땅하게 만들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의 꼭대기에서 완전하였으나...... 하늘의 공평함을 말하듯 무정했으며, 그보다 더욱 삶에 무관심했다. 그나마 그 자색 눈동자가 비교적 온기를 띠는 경우는 자신이 변덕으로 주워다 이름 붙여 키워 놓은 제 것들을 응시할 경우가 고작이었으니 어지간하랴. 그런 그가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제 혈육이라 구분지어진 거대한 선 안쪽에 발 들인 자들을 볼 때. 우연 운명 천명 그 어떤 대단한 단어를 갈갈 긁어모아 치장해도 부족함이 없을 귀하디 귀한 아이들. 그 중에서도 유독 귀여운 손가락이라면, 다른 태를 타고 태어나 저와 동등한 수준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바로 아래의 남동생이었다. 

 

 그래, 라도에게 옥좌를 줘야겠다. 

 참으로 불현듯 떠오른 말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가을 날의 저녁이었다. 그다지 대단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년에 태어난 동생의 생일 선물은 뭐가 좋을까, 뭐가 제 귀여운 형제에게 어울릴까 생각하다보니 떠오른 것이 옥좌였을 뿐이었다. 옥좌만큼 가지고 놀만 한 것이 없었다. 타국 놈들도 자국 놈들도 귀찮게 구는 것들은 귀찮았다만 다 죽이면 덜 귀찮을테니 재미있는 것만 먹을 수 있겠지. 하얀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규칙적으로 까딱거렸다. 황금으로 만든 저울의 한쪽에 온 세계를 두고 다른 한 쪽에 생각도 못한 선물을 받아 깜짝 놀랄 아우의 사랑스러움과, 미래에 얻을 제 아우의 즐거움과, 그걸 보는 자신의 만족이라는 가치를 올려놓으니 후자가 비교할수도 없이 무거웠다. 그래, 그러자. 모든 대륙을 통일한 가혹하나 위대한 황제의 탄생은 이토록이나 간단한 다짐 하나에서 이루어졌다. 

 

 

 폐하께서도 슬슬 머리끝을 다듬으실 때가 되었나. 꽤 길어지시기도 했고 너무 피가 잘 묻으니. 하늘을 닮아 고운 빛이다만 피가 푸른 색이 아니라는 건 참 유감이란 말이지. 제 앞에서 칼을 들고 편전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황제를 보며 황형이 떠오른 생각은 참으로 다정한 종류였다. 어전에서 무례하게 목소리를 높인 죄. 감히 폐하의 신발코를 더럽힌 죄. 그 외에도 이것저것. 그들의 목이 썩둑썩둑 떨어져나가는 이유가 너무도 합당하여 굳이 소리높여 황제를 말릴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한 황형은 무심하게 목간으로 시선을 내렸다. 감히 황제와 황형의 그림자 끝 하나 밟을까 숨소리조차도 크게 못 내는 쥐들은 천지에 널렸으나 황녀들만큼은 달랐다. 하기야 아직 겨우 걸음마 떼고 오라비들을 부르는 호칭이나 서투르게 입밖에 내는 어린 황녀들이 뭐가 무서울까. 황녀들은 제 고사리같은 손바닥에 얼마나 많은 천하와 생명이 쥐여졌는지도 아직 모를 나이였다. . 

 그 아무것도 모르는 황녀들의 곳간에서 자그마한 것 몇 가지 주워 와도 괜찮지 않을까.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저토록 너무도 많은 곳에서 겨우 먼지 한 줌 정도. 별 것 아니니까. 황녀님들이 자라면 그 때 그만두더라도 그 전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자그마한 머리통에서 굴러가는 내용들이 하도 뻔하여 황형은 이미 그 생각 굴러가는 방향까지도 외운 뒤였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황녀의 공간에서 아무리 작은 것을 주워가도, 심지어 발치에 떨어진 아기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라도 모두 황녀들의 것이었으니 그것을 욕심내었다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끌끌 혀를 차며 황형은 또 신하 하나의 목을 치는 황제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음, 오늘 탕에서 나온 주상에게는 따뜻하게 데워 꿀을 넣은 우유를 대령하라 말해둘까. 황제에게 옥좌를 주자 정했던 순간처럼 너무도 평이하고 다정한 사고였다.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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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AU

2019. 12. 15. 00:34 from pokemon/Hwee

 

 이번 대의 왕은 피로 길을 닦는다는 은밀한 저잣거리 소문이 돌았다. 정복전쟁이 활발한 시대였다. 전 세계가 제국의 깃발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노라는 광오한 노랫소리가 수도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춤추는 나라. 가장 거대한 땅덩어리의 가장 고귀한 핏줄은 전 세계를 뒤져 딱 넷 있었다. 정확히 논하자면, 윗세대에서 뿌린 씨는 그의 몇 배는 많았으나, 현재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한 손가락으로도 쉬이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넷 중 가장 먼저 숨을 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공공연하게 다음 대 황제가 될것이라 추앙받던 첫째. 그러한 첫째가 기꺼이 면류관을 그 머리에 얹어주고 황위를 양도한 둘째. 그리고 그 둘보다 한참은 어려 이제 겨우 제 발로 걸음걸이하며 오라버니 부르는 옹알이나 겨우 하는 어린 쌍둥이 황녀가 둘. 개중 첫째와 어린 황녀는 같은 태에서 태어난 동복형제였으나, 황제가 된 둘째는 아니었다. 넷이 나란히 섰을 때 찬연히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와 홀로 다른 색으로 영롱한 푸른빛은 유독 돋보였다. 그러한 넷의 보기드문 우애는 정교한 연기 혹은 거래로 얻어낸 결과일것이라 암암리에 속삭여지고 있었으나, 역시 뭣모르는 자들이 읊는 뒷소리였으니. 황제가 전쟁으로 수도를 비우고 있는 사이 그러한 소식들을 전해듣는 황형은 얌전히 책상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 혀를 자를까, 말까 하며. 

 

 호전성 높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질의 황제는 칼을 뽑고 직접 전장에 나가는 것을 즐겼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있던 일이었다. 부하들만 보내서 얌전히 앉아 세상에 제 것이 되었다면 그게 어디 제 땅입니까. 호기롭게 말하는 아우의 말에 황형은 그저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만 끄덕여주었으니. 황상께서 그리 여기신다면 가시지요. 황상의 빈 옥좌는 제가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겠습니다. 황제가 가만 눈을 뜨고 제 황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한 말을 기꺼이 할 정도로 둘 사이에 의심이 없고 신뢰가 있었다. 오롯하게 황제가 될 것처럼 태어난 사내는 놀랍게도 그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 능력은 출중하다 못해 차고 넘치고, 자비심이 없지는 않았으나 잘라낼 때를 놓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제 선 안의 것들을 아껴 그 바깥의 것에게 기꺼이 가차없어질 수도 있었다. 입 밖에 거짓을 내지 않고 제 동생들을 누구보다 귀여워한다는 것을 그 귀여움을 한몸에 받는 황제가 제일 잘 알았다. 황제가 즉위한 뒤로 황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존대였으나, 황제는 제 형의 목소리가 익숙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네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내가 지원해주마. 걱정 말고 가거라. 여유롭게 빛나는 자수정 색 눈동자를 응시하는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 황형만 믿고 저는 국경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나라를 부탁합니다. 

 

 우아한 미소와 함께 전장으로 떠나 하루가 다르게 승전보를 보내오는 아우에 지지 않을 정도로 수도에서 황형 역시도 피로 나라의 기반을 새로 닦았다. 반황제파의 목을 치고, 황형의 입장에서는 목까지 치기에 살짝 마음에 걸리는 자들은 아우가 돌아올 적까지는 목을 붙여두며 상세하게 죄명을 적어두고, 암살기도를 기꺼이 벗어나고, 감히 여동생들에게까지 흉수를 두려는 자들은 손발을 자르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를 흘리는 대신 백성들에게는 퍽 너그럽게 굴었다. 애초에 그는 제 것에게는 너그러웠고, 귀여워하는 동생들에게는 더 너그러웠으니 바로 그 동생의 백성들에게는 자비를 못 베풀 것 하나 없었다. 동생의 것은 흐뭇하게 웃어줄 정도로 귀여웠다. 황제의 길에 꽃을 뿌리고 웃음과 환호와 존경을 외치는 무지한 백성들은 어찌 귀엽지 않을까. 천년제국따위는 관심 없었으나 동생이 보다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것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지런히 일하는 하얀 손끝에서 수십 수백 수천의 피가 흘렀다가 멎었다가 했으나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하얀 표정에는 거리낌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가 돌아온 날,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그는, 고귀한 자색 옷을 차려입은 황형은 기꺼이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려 황제의 귀환을 기뻐했다. 가지런히 뒤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모습조차 귀해 보일 지경이었다. 심지어 대관식에서조차 무릎꿇지 않을 권리를 거머쥐고 있었던 그다. 가장 고귀한 피. 가장 황제에 가까운 자. 황제의 빈자리에서 황제를 대신하던 자라 암암리에 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자가 그 꼿꼿하던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굽혀 사람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얼마나 충격적인지. 감히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조차 송구스러워 머리를 처박은 신하도 한둘이 아니었다. 어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없이 어수선해지는 공기 속에서 황형은 홀로 미소지었다. 차마 겉으로 티는 못내겠다만 저 신하들 못지 않게─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놀랐을 제 아우의 표정이 눈에 선해서였다. 

 

 "언질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편전에서 뒤로 자빠지는 소제의 모습이 그토록 보고 싶으셨나요. 주변에 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보는 낯이 퍽 당혹스러워 황형이 빙긋 미소지었다. 간만에 보는 아우는 여전히 귀엽고, 상처하나 없이 돌아온 게 마냥 보기 좋았다. 

 "그리하지 않아도 제법 잘 하셨지 않습니까, 황상."

 황형의 등 위로 묵직하게 얹어지는 말은 위엄있고 진중했다. 자리를 비웠던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기에 그보다 더 좋은 모습은 없었으리라. 그는 마음 한구석 다 큰 동생을 마주하는 뿌듯함과 아쉬움을 느꼈다만, 아우는 영 아닌 모양이었다. 아찔했다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짚는 황제를 보며 황형이 소리내어 웃었다. 아직은 조금 더 제 귀여운 아우인가 싶었다. 

 "그리 노여워마세요. 즐거운 소식도 준비했습니다."

 눈끝이 책상 위의 서적으로 흘러갔다. 황형이라는 입장 상 월권 행위가 되어 자신이 목을 치지 못했던 자들의 이름과 죄목을 상세하게 정리해둔 책이었다. 주인 없는 곳간을 노리거나, 주인을 바꿔버릴 시도를 하거나, 그 사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뛰어다니던 자들. 제 황제가 그들마저 깨끗하게 정리해버리면 감히 황제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목소리 낼 자들은 아무도 없어지리라. 

 

 "잠깐 바쁘겠군요."

 "서쪽으로 가기 전까지 소일거리쯤은 있어야 즐겁지 않겠습니까."

 황형이 잠시 웃었다. 황제가 정복하고 온 땅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반란분자의 목을 치고, 제국의 법도를 도입하여 완벽하게 제국인으로 만들기까지 과정이 길었다. 제 귀여운 동생이 땅을 정복하고 제국의 깃발 아래의 것으로 만들었으니 그 밑에서 그곳을 완벽하게 제국의 땅으로 만드는 것은 황형의 일이었다. 동쪽의 끝까지 제국의 것이 되었으니 이제 서쪽 차례였다. 황제야 홀로 완벽했으나 수천수백만의 병사들 하나하나는 인간이었기에 그들이 휴식을 취하고 다시 서쪽의 끝으로 황제의 창이 되어 쏘아지기까지 정비기간 동안 무료할 황제에게 쥐여줄 선물이었다. 

 팔랑팔랑 살생부를 넘겨보는 황제의 표정이 퍽 즐거워보이는 것을 보며 황형도 빙긋이 미소지었다. 그 끝무렵에 피비린내가 언뜻 스쳐지나가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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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vs 회색체육관전

2019. 2. 24. 23:56 from pokemon/Hwayuu



 이렇게 바쁘게 도전할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화유는 살짝 이마를 짚었다가 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지막 쉬는 시간이 조금 바쁜 것을. 원래 어쩌다보면 휘몰아쳐서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거고... 하리는 자신의 내면에 열심히 변명을 했다. 마지막에 길을 해맸던 건 정말로 고의가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어떻게 블루시티 쪽으로 왔었는지 기억을 못 한 탓이었지. 맞아. 다운 씨가 다른 후배님께 하는 설명을 주워 듣고 나도 해 봐야지 싶어서 디그다 동굴을 타고 이 쪽으로 왔었었지...... 참고로 너무 쉬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었다. 화유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몬스터볼을 들었다. 두 개는 무리일 것 같았지만, 하나는 그럭저럭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도전하러 온 셈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아아!"


 상대 체육관 관장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화유가 제일 먼저 꺼내든 몬스터볼은 멜리시의 것이었다. 그녀의 파트너이자, 지금 가장 강한 포켓몬이기도 한 포켓몬. 작은 멜리시가 필드에 등장하자마자 꼬마돌이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화유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명령했다. 


"멜리시, 각지기!"

"꼬마돌, 흙놀이!"


 시작은 부드럽고 평온한 상태로 시작되었다. 화유는 찬찬히 필드를 응시했다. 이제까지 포켓몬을 많이 잡은 것도 아니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화유는 트레이너로서 재능이 아주 뛰어난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뛰어난 연기자... 즉, 배우였으니 트레이너로써의 재능까지 욕심내면 그건 좀 너무한 욕심이리라. 화유 역시도 자신이 그럭저럭 평균치의 트레이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만족했다. 과유불급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함께한 시간이라는 게 있어서, 한 달 동안 노는 듯 수련하는 듯 푹 논 결과 화유의 포켓몬은 첫 번째 체육관까지는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뒤였다. 

 그러니까, 아직 첫 번째 뱃지도 없는 트레이너의 첫 번째 포켓몬을 배려해서 체육관 관장이 내보내는 포켓몬 정도라면, 가뿐하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멜리시, 돌떨구기!"


 멜리시의 돌떨구기는 꼬마돌에 비하자면 압도적으로 강력했고, 돌떨구기를 맞은 꼬마돌은 그대로 기절했다. 물론 이는 레벨의 문제였다. 멜리시는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도 감사한 우주 씨에게 양도받은 이후로도 내내 강했으니까. 작고 사랑스러운 이브이가 갓 받은 초기 레벨을 뽀쟉뽀쟉하게 유지하고 있을 때에도 멜리시는 꽤 강한 포켓몬이었다. 야생에 나와 보니 다들 멜리시 정도의 레벨은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다들 강하기는 했지만. 화유는 꼬마돌을 이기고 자랑해달라는 듯 제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비행하는 멜리시를 품에 한 번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다음은......


"롱스톤, 조이기!"

"그럼 저도! 롱스톤, 자이로볼!"


 상대 짐리더가 꺼내든 포켓몬을 보며, 순식간에 멜리시를 집어넣은 화유는 새로운 포켓몬을 꺼내들었다.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롱스톤은 지금은 화유의 든든한 포켓몬 중 한 마리였다. 레벨을 따지자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상대였다. 화유는 침착하게 필드를 응시했다. 몸통박치기! 짐리더가 다시 한 번 롱스톤에게 명령하는 것을 들으며 화유는 목소리를 높였다. 피하고 조이기! 


 두 마리의 롱스톤이 뒤엉켜 싸우는 모양새를 보며 화유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향 씨에게 포켓몬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지금 보니 정말로 이름을 지어줘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야 자신의 롱스톤과 야생 롱스톤과 타인의 롱스톤을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멀리서 봐도 자신의 롱스톤은 자신의 롱스톤이었지만, 타인은 모르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자이로볼!"


 화유는 목소리를 높였고, 상대 롱스톤이 쓰러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 체육관은 이토록이나 상냥했다. 제 롱스톤이 구어어 울음소리를 내다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자신에게 안겨오는 모양새를 품에 끌어안아 토닥이며 화유는 가볍게 눈을 깜박였다. 그래그래, 잘 했어. 착하지, 내 롱스톤. 화유의 다정한 속삭임에 롱스톤은 기쁘다는 듯 눈을 방긋 휘며 웃었다. 귀여운 모양새였다.






2015자

Posted by 별빛_ :

첫사랑

2018. 11. 15.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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