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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1.01.19 근성의 이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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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붉은 실 上

2022. 11. 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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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다

2021. 9. 30. 20:38 from 카테고리 없음

 

 

어쩌지. 아저씨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전혀 모르겠어. 

 

유채는 아침일찍 집에서 나서 늦게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고민했다. 유채는 내가 어땠으면 좋겠어? 부드럽게 돌려 말한다의 ㅂ자도 모르는 직설적인 질문은 소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기회란 이토록이나 갑작스럽게 쥐여지는 것이었던가? 여기서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하고 물어보면 아저씨는 아빠가 되는 걸까? 그럼 나는... 가족이 생기는 걸까? 이렇게 쉽게? 이렇게 간단히?

 

어린 유채는 혼란에 빠졌다. 어? 이래도 괜찮아? 아저씨 괜찮아요?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저씨 나랑 나이 차이가 몇 살 안 날 텐데? 아홉 살? 열 살? 고작 그 정도로 어린 딸이 있어도 괜찮아요? 나는 아빠랑 엄마가, 가족이 있었으면 하는데? 힘들고 슬플 때 그냥 우앙 우는 게 아니라, 아빠나 엄마를 찾으면서 울고 싶은데? 아저씨를 생각하며 아빠라고 부르며 울어도 나는 이제 괜찮은 거에요? 아저씨는 책임질 수 있나요? 나를 사랑해줄건가요? 지금 그만큼 나를 사랑해서 그렇게 간단히 말한 건가요? 정말요? 몇 번이고 되묻고 확답을 듣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저씨는 무슨 생각으로 말한 걸까? 진심일까? 아니면 그냥 해 본 말일까. 그냥 해 본 말인데 내가 덥석 아빠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아저씨가 싫어하지 않을까??

 

소녀의 조그마한 머리가 터질 듯 복잡해졌다. 하릴 없이 고민하며 헤매고 있는 소녀의 어지러운 심정 따위, 집에서 유채가 늦네 따위의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강산은 먼지만큼도 몰랐지만. 

 

공미포 576

Posted by 별빛_ :

누구세요

2021. 9. 29. 22:37 from pokemon/Gangsan

 

유채에게 어떻게 남고 싶어요?

 

영리한 사촌이 남긴 말은 강산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말이었다. 어떻게 남고 싶냐니? 그게 무슨 뜻일까. 애초에 어떻게 남고 싶은지 본인이 정할 수 있는 문제이기라도 한 건가? 유채가 저를 남이라 생각하면 남이고 가족이라 생각하면 가족이고 스승이라 생각하면 스승이고 후원자라 여기면 후원자겠지. 그걸 정하는 건 유채이지 강산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난새는 그런 말을 했을까? 강산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난새는 저보다 훨씬 현명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질문을 던진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터다. 강산은 바보라서 잘 모르겠지만. 

 

내 의사가 중요한가? 내 표현에 의미가 있는가? 해봤자 크게 변하는 일도 없는데 굳이? 강산은 몇 번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삼켰다. 본인은 잘 모르겠고, 사실 유채에게 어떻게 남고 싶은지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애정이 일방통행이어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나 혼자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데에 타인의 감정은 상관 없지 않은가.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간이었으나, 우선 질문을 받았으니 답을 해야 한다는 다른 종류의 성실함으로 답을 찾았다. 자기 자신에게보다는 좀 더 의미가 있는 소녀의 답을. 

 

"유채야."
"네, 아저씨!"

 

막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소녀에게 손짓한 강산이 다가오는 소녀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무뚝뚝하게 굳은 얼굴과 달리 이런 배려가 묻어나는 행동을 소녀는 좋아했다. 이 다정함이 미련이 되어 소녀를 자꾸 고민하게 만들었다. 무쇠 같은 아저씨가 과연 오늘은 무슨 말을 할까, 기대와 걱정을 담아 소녀는 동그란 눈을 사랑스럽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 기대를 벗어나지 않고, 강산은 과연 대단한 말을 했다. 

 

"유채는 내가 어땠으면 좋겠어?"
"네?"
"아빠나 오빠면 좋겠어? 아니면 그냥 후원자나 스승님 정도가 편해?"

 

갑작스럽게 던져진 예민한 질문에 소녀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바라보던 바라철록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주인아. 그걸 그렇게 직구로 물어보면..... 아니, 아니다. 주인의 최선이다. 힘냈다. 바라철록은 포기하고 조용히 유채를 응원했다. 좋은 답을 돌려줄 수 있도록. 

공미포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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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꽃  (0) 2021.09.27
Posted by 별빛_ :

나무와 꽃

2021. 9. 27. 17:04 from pokemon/Gangsan

 

  들꽃처럼 여린 소녀와 나무처럼 억센 청년은 얼핏 보기에 참으로 다정한 사이였다. 달콤한 크림처럼 상냥하고 다정하며 맑은 소녀는 제 짧은 보호자를 존중하여 사랑해줬고, 뻣뻣하니 튼튼한 청년은 제 짧은 피보호자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해주려 애썼다. 어떤 미래를 손에 거머쥘 지 모르는 씨앗을 최대한 자유롭게 풀어두려 애썼다. 강산은 언제나 여린 풀을 키우는 데에 서툴러서, 차라리 자신이 아닌 제 포켓몬들과 자유롭게 풀어두는 게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났기 때문에. 몇 없는 경험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자유롭게 클 수 있도록, 건강하게 클 수 있도록, 자기 하고 싶은 그대로 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찬란하게 반짝일 수 있도록. 행복하도록. 

 

  순진하리만치 곧은 애정이었다. 허나 타고나기를 무디고 둔하게 태어난 청년은 소녀가 몰래 아이들에게 속닥였던 것처럼, 그는 나무를 가장하고 있는 바위인지라. 자신이 속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아낌없이 말하지 않았다. 사실 말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랬으니까. 말 수 적은 아버지나 어머니 틈에서 자랐고 자신보다 훨씬 똑똑해서, 필요하다 여기면 꼬치꼬치 캐물어 답을 알아내고 납득해내는 사촌형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산은 자신이 부모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라고 물어보면...... 글쎄. 햇빛이 눈부시고 상처가 나면 아프다는 당연한 진리에 굳이 왜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 있을까? 실제로 애정이 진실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믿음 아래 진실이 있었다. 강산은 그냥, 그냥 그렇게 태어나 살았다. 아이인 시절부터 애정을 의심치 않았으니 표현이 없더라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럴수도 있지. 청년은 그렇게도 잘만 살았다. 유감스럽게도 갑작스럽게 들이게 된 아이가 강산보다 훨씬 섬세하고, 훨씬 정에 굶주렸고, 훨씬 부드럽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그렇게 홀로 살아갔을 것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가족이 없었던 소녀는 자신에게 뚝 떨어진─정확히는 자신이 '뚝 떨어진' 것이겠지만─보호자를 내내 막연하게 응시했다. 이 사람은 계속 내 옆에 있어줄 수 있을까? 한 번 쓰다듬어주고 가 버리지 않고, 내내 나를 좋아해줄까? 나를 사랑해줄까? 나를 보호해줄까? 나를 긍정하고, 존중하고, 성실하게, 그리하여 어쩌면...... 가족이 되어줄까? 청년은 놀랍게도, 물론 여신이 점지해 준 인연이니 당연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놀랍게도 그 조건을 모조리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상대의 갈망과 상대의 애정을 알아차리기에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강산은 유채의 간절함을 몰랐고, 유채는 강산이 너무도 투박하게 표현하는 애정을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을 머금고도 둘 사이는 그럭저럭 원만하게 보였다. 청년은 투박하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건 꼭 챙겼고, 아이는 불안하다고 해서 날카롭게 반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랑스럽게 웃어주는 아이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고 가는 청년은 겉으로 보기에 사이 좋은 보호자와 피보호자였다. 물론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혹은 불안하게 지켜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다. 아이의 불안을 민감하게 눈치챌 수 있는 포켓몬. 특히 아이의 보모 포켓몬 역할을 하고 있는 바라철록은 제 무딘 주인이 무척 못마땅했다. 아이는 확신을 원했다. 말없이 베푸는 애정이 아니라, 품에 끌어안고 너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내내 아낄 것이라고, 네가 먼 미래에 돌아가 되돌아오더라도 너는 내 귀여운 동생이고 귀여운 딸일 거라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아이는 가족을 원했다. 

  강산은 아이가 원한다 딱 한 마디만 말한다면 기꺼이, 아니. 도리어 어리둥절하다는 듯 되물을 게 뻔했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 아니었느냐고. 나는 이미 네가 아주 소중하다고. 아이가 이미 왜 그런 당연한 걸 굳이 묻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어이고, 이 멍청한 주인. 바보 주인. 못나고 못난 주인. 바라철록은 강산의 엉덩이를 뒷굽으로 뻥 차 주고 싶었다. 차봤자 왜 맞았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눈이나 껌벅이겠지만. 당신이야 바위고 강철이고 아무튼 둔해 빠져서 모르겠지만 유채는 평범한 아이의 감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데다가 당신과 만난지 반 년도 안되어서, 당신의 암묵적인 무언가 따위는 전혀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사촌인 난새는 태어난 순간부터 핏줄이라는 인연에 얽매여 미우나 고우나 당신이랑 오래오래 부딪히다보니 속이 터져도 당신을 대충 이런 놈이겠거니 이해한 거겠지만, 그러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고. 이제는 시간이 없다고. 

 

  유채가 용기를 내거나, 강산이 눈치를 채거나...... 어느 쪽이 더 빠를지 바라철록도 모르겠다. 한숨을 푹 쉬며 영리한 포켓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녀가 강산의 웃는 얼굴과 그 칭찬을 듣고 싶다는 가냘픈 욕심으로 조그마하게 힘을 냈으니, 잘 풀리면 좋겠다고 기도나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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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0) 2021.09.29
Posted by 별빛_ :

삐티 수위타로 결과

2021. 6. 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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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au

2021. 1. 31. 14:36 from pokemon/Ram

https://twitter.com/Dell_windy/status/1355589174892457985?s=20

이 타래 이어보기입니다

브금 : youtu.be/dtTv6sr_2gI

 

 

 

 

 

* * *

 

 

 

 

“일어나, 샤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여자아이를 깨웠다. 다닥다닥 붙은 지저분한 골목길, 각자 다른 불행이 퍼즐처럼 짜맞춰진 그곳에서도 생명은 태어났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람과 없는 게 더 나은 부모를 가진 샤론. 둘 다 비슷하게 바닥 어딘가를 헤매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을 모르는 둘은 그 속에서 그럭저럭 행복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깨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탄생을 함께한 두 소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였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샤론이 눈을 부비적거리며 람을 올려다보았다. 복슬복슬하게 이리저리 뻗치는 갈색 머리카락을 어설프게 손으로 정리해주며 람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둘 다 낡고 지저분한 옷차림의 버렁뱅이 꼬맹이들이었으나, 람 쪽이 좀 더 기가 강하고 샤론은 그에 비해 순한 면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샤론의 손을 잡고 먼저 내달리는 쪽이 붉은 머리 소녀였다는 소리다. 먼지가 묻은데다가 아이 특유의 동그란 선이 제대로 먹지 못해 조금 가냘프게 변한 얼굴을, 람이 몇 번 다정하게 문질러 주었다.

 

“가자, 샤론!”

“오늘은 어디로 갈 건데?”

“음~ 바다!”

“람은, 어제도 갔으면서.”

 

  그리 말하면서 샤론은 기꺼이 람의 손을 잡았다. 두 어린 시궁쥐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어디서 뭘 먹을까? 바다에서 물고기 잡을 수 있을까? 못 잡으면 어디서 얻어먹고 훔쳐먹을까? 하루 한 끼 먹으면 잘 먹는 것이고 못 먹으면 평소처럼 재수가 없는 날이다. 오늘은 어떨까 궁리하며 둘은 바다까지 달음박질쳤다.

 

“람은 바다가 그렇게 좋아?”

“좋아! 멋있잖아!”

“그렇게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것도 대단해~.”

 

  샤론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건내는 칭찬에 람의 뺨도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칭찬을 받을 일이 드문 환경에서 두 사람은 가끔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똑바로 칭찬을 주고받았다. 서로밖에 서로를 좋아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유일한 상대에게 약해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흐름이었다. 자존심 탓인지 수줍은 기색을 애써 숨기고 있었으나, 어린 나이 탓인지 영 숨기지 못하고 끝내 기쁘게 웃어버린 소녀가 반갑게 제 친구를 응시했다.

 

“그럼 말이지, 샤론!”

“응?”

“나는 언젠가 꼭 저 바다의 주인이 될 거니까!”

 

푸른 색 눈동자가 녹색 눈동자를 말갛게 응시했다. 막연하고 대단하고 허황된 꿈을 말하는 람의 눈은 늘 이렇게 반짝거렸다. 샤론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웃으며 마주 응시해주었다. 꽃처럼 웃어주는 샤론을 보며 람은 행복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보잘 것 없지만 반드시 지키겠다는 두 사람의 약속의 증표.

 

“그렇게 되면───,”

 

 

 

***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전투 상황에서 딴 생각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겠지만, 소녀는 속절없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네가 무엇보다 소중했던 시절이 있었다. 삶의 절반이 너였던 시기가 있었다.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고 완벽한 차림새를 하고 우아한 영애가 되어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편린이. 먼지 뭉치같은 계집아이가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웃던 보잘 것 없던 행복이 있었다. 우리의 삶은 시작이 그렇게나 유사했는데. 지금 이렇게나 다른 곳으로 멀리 와 버렸지만.

 

 쨍! 검과 검이 다시 한 번 매섭게 충돌하고,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상대는 자비 없이 곧장 목을 노리는 날카로운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고, 람은 그를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이유로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는 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대련도 아니고, 결투도 아니다. 상대를 죽이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안대로 가려진 시야를 노려오는 검을 막아내며 소녀는 몇 걸음이고 물러섰다.

 

 람은 몇 주 전 이곳에 왔을 때, 똑같은 이유로 똑같이 이곳에 있던 상대에게 다쳤다. 람은 샤론을 여기서 그렇게 만나게 될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고, 샤론은 람이 이곳에 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 간극에서 나오는 차이가 소녀에게 상처를 냈다. 거의 십 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도 서로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람은 놀라서 한 걸음 다가왔고, 샤론은 칼을 들었다. 한 쪽 눈만 다치고 자리를 피했던 것조차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 나을 때까지 이 안대는 벗으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그리고 눈물을 흘리시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만약 그랬다간 정말로 눈이 멀어 버릴 겁니다. 상처가 깊어요.’

 

 그 덕분에 알았다. 그제야 알았다. 너와 함께하지 못한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 변해버렸구나. 아니, 어쩌면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사람으로서의 샤론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상냥한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입장은 많이 변했구나. 우리는 적이고 같은 목표를 가진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상황이 되었구나.

 

 선득한 검날이 오른팔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람도 샤론의 품으로 파고들어 날카롭게 목을 노렸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그걸 피해낸 샤론이 나는 것처럼 훌쩍 뒤로 물러섰다. 간격을 견제하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대화는 필요 없고, 서로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다정한 대화와 잘못했다는 사과, 미안하다는 말과 용서도 필요 없다. 아니, 그게 여기에 끼어서는 안 되었다. 하고 싶어도 감히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러니 람은 의식적으로 생각을 누르고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눈앞의 사람은 강한 검사다. 내 적이다. 그것만 생각하고 몸이 움직이는 그대로 따랐다. 꼬맹이 시절 주워져 오래 갈고닦은 몸은 뇌의 정확한 명령 없이도 움직였다. 상대를 베고, 이쪽도 베이고, 피가 튀는 것도 통증도 모조리 무시하고 그렇게,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상처가 터지고 피가 튀었다. 둘 사이 실력 차이는 없었지만 들고 있는 무기가 달랐다. 샤론은 검을 버릴 수 없지만 람은 결정적인 순간 찔러넣으며 검을 버리고 총을 들 수 있었다. 서 있는 소녀와 쓰러진 소녀를 결정지은 건 그런 보잘 것 없는 차이였다. 들고 있는 도구 따위.

 

 

 

 

 거친 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승패가 갈리는 소리. 죽어가는 소리가 났다. 람이 샤론을 내려다보았다. 서 있는 건 결국 그녀였다.

 

 있지, 샤론. 나는 늘 무서웠어. 나한테는 너밖에 없었는데 네가 없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너희 오빠가 너희 아빠 손에 이끌려 그렇게 없어지고 너마저 없어질까봐. 나는 내내 무서워서, 그래서 아침만 되면 너를 만나러 그렇게 매일 뛰어가서 자고 있는 너를 깨웠던 거였는데.

 내가 먼저 없어져버려서 미안해. 계속 같이 있겠다는 약속도 못 지켜서 미안해. 같이 배를 타자는 약속도 못 지켜서 미안해. 나는 네 앞에서만큼은 늘 거짓말쟁이야. 후작부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부탁해서 널 찾으러 왔을 때 네가 이미 없었어. 늦어서 미안해. 변명하는 것도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감히 입밖에 내지 않을 이기적인 말들로 속을 가득 채우며, 람은 샤론을 보았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감히 너를 죽여야 할까? 총을 든 손이 떨렸다. 처음 이 금속덩이을 잡았을 때도 두렵지 않던 공포가 지금은 발끝에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왔다.

 

“……람,”

“샤론.”

 

 네가 나를 불렀다. 아주 오랜만에, 녹색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숲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샤론의 눈에 한가득 물이 고이더니, 곧 하염없이 떨어졌다. 네가 울고 있었다.

 

“너만 보면 내가 미워져. 너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내가…….”

 너를 잊고 살았던 게 아니야. 계속 찾았어. 모든 노예상점을 전부 뒤집었어. 네가 팔렸다고 해서 그랬어. 그런데도 널 못 찾은 나를 계속 미워하면 돼. 너를 위해 죽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무…….”

 미안해.

 

“싫어…….”

 미안…….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가득 떨어졌다. 울어서도 안 되는데 참을 수 없었다. 피에 젖어 있던 안대 안쪽에서도 눈물이 점점이 흘러 떨어졌다. 너는 이미 살아나갈 수 없을 만큼 출혈이 심하고 당장 너를 업고 이곳에서 뛰쳐나갈 수 없는 나는 친구를 죽인 살인자였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너는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것밖에 없었다.

 

 람이 샤론에게 다가갔다. 샤론은 이제 몸을 피할 만큼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몸을 숙인 소녀는, 마지막 숨을 거둬갈 총을 쏘는 것 대신, 애도의 마음을 담아 꽃을 뿌리는 것 대신 피와 눈물로 젖은 안대를 벗어 제 옛 벗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린 시절 새끼손가락에 걸었던 약속을, 너는 이제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세상의 절반.”

‘그렇게 되면───, 샤론에게 절반 줄게!’

 

 나는 아직 바다의 주인이 되지 못했지만. 나는 반드시 이 바다의 가장 높은 곳에 설 거야. 물론 나는 너랑 한 약속을 잘 못 지키는 거짓말쟁이지만, 이번 한 번만 더 손해 보는 셈 믿어 주면 좋겠어. 귀신이 되어서 계속 쫒아다녀도 좋으니까. 잘 지키는지 확인해도 되니까.

 

“……먼저 줄게.”

 

 내가 앞으로 보아나갈 세계. 앞으로 보아나갈 모든 바다를. 한 쪽 눈이 욱신거렸지만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빛을 받은 시야가 점점 흐려졌으나, 람은 그대로 일어났다. 점점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샤론은 말을 할 기력조차 사그라들고 있었고. 람 역시 제정신이 아닌지라 누가 다가오는지 이 정도까지 가까워진 뒤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집사가 된 모습을 멀찍이서 한 번 본 게 다지만. 기억나서 다행이다.

 

 샤론, 네 오빠가 오고있어.

 

 그러니 살인자는 도망치는 게 도리겠지. 네 마지막 시간마저 내가 훔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소녀는 몸을 돌려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친구를 뒤에 두기로 정했으니까, 제 선택의 결과를 손에 넣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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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근성의 이야기 7

2021. 1. 19. 00:48 from pokemon/Ram

일곱 번째. VS 메로엣타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마지막 한 마리는 이미 정해졌겠죠?"

 

  소녀는 다정한 눈으로 수조를 응시했다. 아직 유일하게 '작은' 람의 한 마리뿐인 포켓몬. 오랫동안 진화할 수 있는 순간만을 기다려주던 귀여운 빈티나. 제 품에 들어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고운비늘을 슈가에게 받은 건 빈티나가 제 품에 들어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사실 언제든지 진화시킬 수 있었지만, 빈티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순간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기에 람도 그 마음을 존중하여 계속 기다려주고 있었다. 샤론의 시련에서 한결 강해졌고, 악몽에서 빠져나오고 신전에서 달음박질치며 한결 단단해졌다. 조금 더 다른 모습으로 자라도 괜찮노라 여길 만큼 자랐다. 제 본래의 이름을 받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미로슈라는 이름은, 저에게만 붙은 특별한 별명은 두 소중한 사람과, 밀로틱이 될 언젠가의 미래를 꿈꾸며 붙었던 것이니까. 빈티나는 이제 제 첫 번째 트레이너에게도, 저에게 진화의 빛을 선물해준 트레이너에게도, 무엇보다 영영 소중할 제 트레이너에게도 가슴을 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조에 살짝 손을 얹으며, 소녀가 물었다. 

 

"어때요, 각오는 되었나요?"

 

  그리고 제 주인의 물음에, 미로슈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로슈, 기술에 휘둘리지 말고 똑바로 기합을 넣어요! 다른 아이들이 쓰는 걸 몇 번이고 보았겠죠?!"

"메로엣타, 물러서지 말고!"

 

  작고 사랑스러운 환상의 포켓몬이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했다. 그리고 몇 배나 거대해진 밀로틱이 매섭게 그 뒤를 쫒았다. 빈티나에서 밀로틱으로 진화하며 이런저런 다른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만, 밀로틱은 아직 자신이 쓸 수 있는 기술에 능숙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기합과 근성과 진화의 기적 따위로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메로엣타와 선생님은 얼버무림 따위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닐 터. 쫒아갔다가 맞아서 돌아온 밀로틱에게 카레를 한 입 먹여준 람이 그 긴 몸체를 찰싹 때려줬다. 

 

"허둥댈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그리고 이제껏 본 다른 아이들의 기술도 잘 기억하고 있죠?"
"미이!"
"좋아요! 당신의 성장을 나한테도 보여줘요!"

 

  메로엣타도 이젠 많이 지쳤다. 그리고 딱 그 백 배쯤 지쳐서 쓰러지고 싶은 걸 정신력으로 참아 버티며, 람이 조금 쉬어가는 목소리로 짜랑짜랑하게 외쳤다.

 

"미로슈!! 하이드로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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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

근성의 이야기 6

2021. 1. 19. 00:30 from pokemon/Ram

여섯 번째. VS 거다이라프라스 

 

 

 

"그리고 여기서... 거다이라프라스를 내보내시네요, 선생님이."

 

  소녀가 화면을 조용히 짚었다. 대지를 잠재우고 바다를 불러올 거대한 라프라스가 화면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꽉 차있었다. 화면을 내려다보던 속눈썹이 곧 하늘을 향했다. 동일 타입 트레이너라면 겹치는 포켓몬 따위 몇 있기 마련이었고, 람에게도 선생님이나 넬로와 중복되는 포켓몬이 몇 마리 있었다. 그 중 하나. 거다이맥스를 하는 아이들은 다들 라프라스였다. 거대한 섬의 왕마저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물의 괴수. 

 

"라프라스. 부탁할게요."

"라아아♪"

 

  외로움 타는 성정의, 그러나 그만치 상냥한 라프라스가 부드럽게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다이맥스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포켓몬이라는 이유로 배틀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를 무리시키는 게 아닐지, 람은 늘 신경 쓰고 미안해 했다. 라프라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배틀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으니 트레이너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지만...... 홀로 있으면 금방 쓸쓸해지는 포켓몬은 트레이너의 관심과 사랑을 기꺼이 독식하기로 했으니, 람의 걱정을 풀어줄 마음은 그다지 없었다. 크고 촉촉한 머리를 트레이너에게 가볍게 보비작거리며 라프라스는 즐겁게 울었다. 

 

  엠페르트도 샤미드도 미로슈도 가장 강한 물 포켓몬을 꿈꾸며 자신을 단련하는 타입이고, 골덕이나 플로젤은 주인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오랭열매가 떨어진다 굳게 믿으며 주인을 쫄래쫄래 쫒는 타입이었다면, 라프라스는 한 발자국 뒤에서 그런 포켓몬들의 등을 토닥여주는 역할이었다. 스스로도 모두에게 감사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제 역할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특별한 힘으로 특별해져 당신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역할 역시도, 좋아했으니까. 

 

 

 

 

"라프라스, 다이어택!"

"다이월로 방어하자, 아리아!"

 

  두 마리 거다이맥스 라프라스의 싸움은 그야말로...... 그야말로 해일의 싸움이었다. 배우고 있는 기술은 거의 유사하지만, 아리아는 다이썬더를, 라프라스는 다이어택을 배우고 있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람이 한결 불리했다. 역시 무지카 선생님. 소녀는 그 상태에서 작게 눈을 굴렸다. 어떻게 공략해야 이길 수 있을까. 사실 거대한 라프라스들은 한 번씩 기술을 공유한 다음 한 템포 쉬고, 다시 한 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둘 다 자신이 거대해진 만큼 속도를 잃었고, 그만한 체력을 손에 넣었으니 묵직한 한 방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아래 회피를 아예 포기하고 과감하게 맞거나 슬쩍 방어하며 완벽하게 맞대응하고 있었다. 물론 이 쪽이...... 훨씬 약했지만. 틈틈히 라프라스에게 카레를 먹여주며 람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날씨가 덥진 않지만 벌써 다섯 번 째 포켓몬이다. 포켓몬 뿐만 아니라 트레이너에게 기력을 상당히 많이 뺏었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내내 물 포켓몬들의 공격이지 않았던가. 물기와 습기로 가득 찬 이곳은 마치 수중동굴 같았다. 분명 폭포 옆 호수라는 탁 트인 공간이었는데도! 

 

  소녀가 즐겁게 웃었다. 조금 더, 아무리 힘들고 지쳐서 쓰러질 것 같더라도 조금 더 이 배틀을 즐기고 싶었다. 스스로가 이뤄낸 포켓몬들의 성장을 자신도 조금 더 보고 싶었으니까. 

 

"라프라스, 전심전력 온 힘을 다해서, ......다이스트림!"
"어머나♬ 후후. 그럼 아리아, 이쪽도... 똑같이 맞받아쳐주자, 다이스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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