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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타래 이어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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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일어나, 샤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여자아이를 깨웠다. 다닥다닥 붙은 지저분한 골목길, 각자 다른 불행이 퍼즐처럼 짜맞춰진 그곳에서도 생명은 태어났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람과 없는 게 더 나은 부모를 가진 샤론. 둘 다 비슷하게 바닥 어딘가를 헤매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을 모르는 둘은 그 속에서 그럭저럭 행복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깨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탄생을 함께한 두 소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친구였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샤론이 눈을 부비적거리며 람을 올려다보았다. 복슬복슬하게 이리저리 뻗치는 갈색 머리카락을 어설프게 손으로 정리해주며 람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둘 다 낡고 지저분한 옷차림의 버렁뱅이 꼬맹이들이었으나, 람 쪽이 좀 더 기가 강하고 샤론은 그에 비해 순한 면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샤론의 손을 잡고 먼저 내달리는 쪽이 붉은 머리 소녀였다는 소리다. 먼지가 묻은데다가 아이 특유의 동그란 선이 제대로 먹지 못해 조금 가냘프게 변한 얼굴을, 람이 몇 번 다정하게 문질러 주었다.
“가자, 샤론!”
“오늘은 어디로 갈 건데?”
“음~ 바다!”
“람은, 어제도 갔으면서.”
그리 말하면서 샤론은 기꺼이 람의 손을 잡았다. 두 어린 시궁쥐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어디서 뭘 먹을까? 바다에서 물고기 잡을 수 있을까? 못 잡으면 어디서 얻어먹고 훔쳐먹을까? 하루 한 끼 먹으면 잘 먹는 것이고 못 먹으면 평소처럼 재수가 없는 날이다. 오늘은 어떨까 궁리하며 둘은 바다까지 달음박질쳤다.
“람은 바다가 그렇게 좋아?”
“좋아! 멋있잖아!”
“그렇게 좋아하는 게 있다는 것도 대단해~.”
샤론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건내는 칭찬에 람의 뺨도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칭찬을 받을 일이 드문 환경에서 두 사람은 가끔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똑바로 칭찬을 주고받았다. 서로밖에 서로를 좋아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유일한 상대에게 약해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흐름이었다. 자존심 탓인지 수줍은 기색을 애써 숨기고 있었으나, 어린 나이 탓인지 영 숨기지 못하고 끝내 기쁘게 웃어버린 소녀가 반갑게 제 친구를 응시했다.
“그럼 말이지, 샤론!”
“응?”
“나는 언젠가 꼭 저 바다의 주인이 될 거니까!”
푸른 색 눈동자가 녹색 눈동자를 말갛게 응시했다. 막연하고 대단하고 허황된 꿈을 말하는 람의 눈은 늘 이렇게 반짝거렸다. 샤론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웃으며 마주 응시해주었다. 꽃처럼 웃어주는 샤론을 보며 람은 행복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보잘 것 없지만 반드시 지키겠다는 두 사람의 약속의 증표.
“그렇게 되면───,”
***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전투 상황에서 딴 생각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겠지만, 소녀는 속절없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다. 네가 무엇보다 소중했던 시절이 있었다. 삶의 절반이 너였던 시기가 있었다.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고 완벽한 차림새를 하고 우아한 영애가 되어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편린이. 먼지 뭉치같은 계집아이가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웃던 보잘 것 없던 행복이 있었다. 우리의 삶은 시작이 그렇게나 유사했는데. 지금 이렇게나 다른 곳으로 멀리 와 버렸지만.
쨍! 검과 검이 다시 한 번 매섭게 충돌하고,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상대는 자비 없이 곧장 목을 노리는 날카로운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고, 람은 그를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이유로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는 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대련도 아니고, 결투도 아니다. 상대를 죽이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안대로 가려진 시야를 노려오는 검을 막아내며 소녀는 몇 걸음이고 물러섰다.
람은 몇 주 전 이곳에 왔을 때, 똑같은 이유로 똑같이 이곳에 있던 상대에게 다쳤다. 람은 샤론을 여기서 그렇게 만나게 될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고, 샤론은 람이 이곳에 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 간극에서 나오는 차이가 소녀에게 상처를 냈다. 거의 십 년이나 만나지 못했는데도 서로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봤다. 람은 놀라서 한 걸음 다가왔고, 샤론은 칼을 들었다. 한 쪽 눈만 다치고 자리를 피했던 것조차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 나을 때까지 이 안대는 벗으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그리고 눈물을 흘리시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만약 그랬다간 정말로 눈이 멀어 버릴 겁니다. 상처가 깊어요.’
그 덕분에 알았다. 그제야 알았다. 너와 함께하지 못한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 변해버렸구나. 아니, 어쩌면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사람으로서의 샤론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상냥한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입장은 많이 변했구나. 우리는 적이고 같은 목표를 가진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상황이 되었구나.
선득한 검날이 오른팔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람도 샤론의 품으로 파고들어 날카롭게 목을 노렸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그걸 피해낸 샤론이 나는 것처럼 훌쩍 뒤로 물러섰다. 간격을 견제하며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대화는 필요 없고, 서로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다정한 대화와 잘못했다는 사과, 미안하다는 말과 용서도 필요 없다. 아니, 그게 여기에 끼어서는 안 되었다. 하고 싶어도 감히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러니 람은 의식적으로 생각을 누르고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눈앞의 사람은 강한 검사다. 내 적이다. 그것만 생각하고 몸이 움직이는 그대로 따랐다. 꼬맹이 시절 주워져 오래 갈고닦은 몸은 뇌의 정확한 명령 없이도 움직였다. 상대를 베고, 이쪽도 베이고, 피가 튀는 것도 통증도 모조리 무시하고 그렇게,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상처가 터지고 피가 튀었다. 둘 사이 실력 차이는 없었지만 들고 있는 무기가 달랐다. 샤론은 검을 버릴 수 없지만 람은 결정적인 순간 찔러넣으며 검을 버리고 총을 들 수 있었다. 서 있는 소녀와 쓰러진 소녀를 결정지은 건 그런 보잘 것 없는 차이였다. 들고 있는 도구 따위.
거친 숨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승패가 갈리는 소리. 죽어가는 소리가 났다. 람이 샤론을 내려다보았다. 서 있는 건 결국 그녀였다.
있지, 샤론. 나는 늘 무서웠어. 나한테는 너밖에 없었는데 네가 없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너희 오빠가 너희 아빠 손에 이끌려 그렇게 없어지고 너마저 없어질까봐. 나는 내내 무서워서, 그래서 아침만 되면 너를 만나러 그렇게 매일 뛰어가서 자고 있는 너를 깨웠던 거였는데.
내가 먼저 없어져버려서 미안해. 계속 같이 있겠다는 약속도 못 지켜서 미안해. 같이 배를 타자는 약속도 못 지켜서 미안해. 나는 네 앞에서만큼은 늘 거짓말쟁이야. 후작부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부탁해서 널 찾으러 왔을 때 네가 이미 없었어. 늦어서 미안해. 변명하는 것도 미안해.
이런 상황에서 감히 입밖에 내지 않을 이기적인 말들로 속을 가득 채우며, 람은 샤론을 보았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감히 너를 죽여야 할까? 총을 든 손이 떨렸다. 처음 이 금속덩이을 잡았을 때도 두렵지 않던 공포가 지금은 발끝에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왔다.
“……람,”
“샤론.”
네가 나를 불렀다. 아주 오랜만에, 녹색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숲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샤론의 눈에 한가득 물이 고이더니, 곧 하염없이 떨어졌다. 네가 울고 있었다.
“너만 보면 내가 미워져. 너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내가…….”
너를 잊고 살았던 게 아니야. 계속 찾았어. 모든 노예상점을 전부 뒤집었어. 네가 팔렸다고 해서 그랬어. 그런데도 널 못 찾은 나를 계속 미워하면 돼. 너를 위해 죽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무…….”
미안해.
“싫어…….”
미안…….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가득 떨어졌다. 울어서도 안 되는데 참을 수 없었다. 피에 젖어 있던 안대 안쪽에서도 눈물이 점점이 흘러 떨어졌다. 너는 이미 살아나갈 수 없을 만큼 출혈이 심하고 당장 너를 업고 이곳에서 뛰쳐나갈 수 없는 나는 친구를 죽인 살인자였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너는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것밖에 없었다.
람이 샤론에게 다가갔다. 샤론은 이제 몸을 피할 만큼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몸을 숙인 소녀는, 마지막 숨을 거둬갈 총을 쏘는 것 대신, 애도의 마음을 담아 꽃을 뿌리는 것 대신 피와 눈물로 젖은 안대를 벗어 제 옛 벗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린 시절 새끼손가락에 걸었던 약속을, 너는 이제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세상의 절반.”
‘그렇게 되면───, 샤론에게 절반 줄게!’
나는 아직 바다의 주인이 되지 못했지만. 나는 반드시 이 바다의 가장 높은 곳에 설 거야. 물론 나는 너랑 한 약속을 잘 못 지키는 거짓말쟁이지만, 이번 한 번만 더 손해 보는 셈 믿어 주면 좋겠어. 귀신이 되어서 계속 쫒아다녀도 좋으니까. 잘 지키는지 확인해도 되니까.
“……먼저 줄게.”
내가 앞으로 보아나갈 세계. 앞으로 보아나갈 모든 바다를. 한 쪽 눈이 욱신거렸지만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빛을 받은 시야가 점점 흐려졌으나, 람은 그대로 일어났다. 점점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샤론은 말을 할 기력조차 사그라들고 있었고. 람 역시 제정신이 아닌지라 누가 다가오는지 이 정도까지 가까워진 뒤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집사가 된 모습을 멀찍이서 한 번 본 게 다지만. 기억나서 다행이다.
샤론, 네 오빠가 오고있어.
그러니 살인자는 도망치는 게 도리겠지. 네 마지막 시간마저 내가 훔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소녀는 몸을 돌려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친구를 뒤에 두기로 정했으니까, 제 선택의 결과를 손에 넣어야 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