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부드럽게 귀를 까딱였다. 하얀 귀는 청년의 감정을 알려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세피로트의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자주 웃게 되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무표정하고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청년이었다. 알게모르게 전쟁을 겪으면서 훨씬 황폐해진 이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다만 어렸을 적부터 귀만큼은 솔직하게 움직였다. 버릇처럼, 지금도 그랬다. 기분 좋다는 양 살랑살랑 흔들리는 하얀 귀가 허공을 부드럽게 수놓았다.
"그렇구나. 길잡이덩쿨, 그게 네 꽃이었구나?"
그러고보면 그랬다. 앙수즈는 인간, 화인. 꽃에서 피어난 생명. 다른 인간 친구들을 보면서도 한 번쯤은 그들이 무슨 꽃에서 태어났을지 호기심을 가진 적 있었다. 물론 드워프들을 보면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꽃도 보석도 좋아했으니까. 알록달록한 색을 가진 청초한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라테스란은 한가득 피어난 꽃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 꽃집을 종종 방문하여 집을 장식하는 것도 그였다.
푸른 꽃잎을 가진 꽃들은 그가 아는 종류만으로도 여러 개 있었다. 가장 먼저 물망초, 그 다음으로 수국, 수련, 용담, 블루벨, 페리윙클, 꽃잎 푸른 장미, 네모필라, 클레마티스, 에린지움, 옥시페탈럼, 그리고 길잡이덩쿨.
라테스란은 자신이 아는 길잡이덩쿨 꽃을 생각해보았다. 꽃잎은 여섯 갈래로 갈라지고, 어두운 곳에서는 빛이 나는 꽃. 무슨...... 습성 때문에 이름이 길잡이덩쿨이었는데. 청년이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떠올리기 위해 노력해보았으나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꽃집을 한창 문턱 닳도록 드나들던 때에 이리저리 주워들으며 알고 있는 정도인지라 잘 아는 꽃은 아니었다.
화인의 인생은 꽃말로 나타났다. 그의 막내 여동생이 인간인지라 그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꽃에 대해 공부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꽃말부터 학습했다. 길잡이덩쿨의 꽃말이 분명, 분명......
"지식의 언어, 였던가? 너랑 잘 어울리네."
청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거짓 한 줌 없는 진심이었다. 이름도 꽃도 그를 보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의미였다. 엷지만 부드럽게 웃고 있던 얼굴은 앙수즈의 말이 이어질 때 조금 흐려졌다가, 다시 견고해졌다. 고운 색 황금빛 눈동자가 가만히 앙수즈를 응시했다. 보석을 조각한 마냥 빛 받아 반짝이는 눈을 한 번, 시선을 떨궈 바닥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올렸다. 잔잔한 황금이 느릿하게 곡선을 그렸다.
살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기뻤다. 이 세피로트의 아이들 중 몇은 제 몫숨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 마냥 움직였다. 앙수즈가 그러지 않아줘서 안심했다. 그는 본디 그랬으나 이 모든 사건을 겪고도 변함없이 그래주어 고마웠다.
전쟁터에서 정말 많이 울었다. 한 차례 싸움이 끝나고 막사에 돌아와 망자들의 시신을 정돈하면 그 머리맡에서 한참을 눈물 흘리며 괴로워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눈물만 떨구며 그들과 이별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오는 악몽이었다. 함께 전장에 섰던 럭이나 에센티아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어 주었기에 여전히 지금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눈물은 말라버린 듯 나오지 않았다. 오르 님이 떠나던 순간까지도. 하지만 그게 슬프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가득 차버린 댐에 구멍이 나면 순식간에 망가지리라는 것도 알았다.
"넌 약하지 않아, 앙수즈."
왜 그리 생각하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으나, 그는 현명하고 영리하며, 매력적이고, 운용할 수 있는 마력도 많았다. 더군다나 곧 마법사로 각성하겠지. 약하다고 스스로 폄하할 수준이 아님은 자명했다. 그는 종종 자신을 낮잡아보는 것처럼 말했다. 청년은 그 점에 의아함과 속상함을 동시에 느끼고는 했다.
라테스란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한 쪽 손이 한참 망설이듯 느릿하게 들려져서 천천히 앙수즈의 한 쪽 뺨에 닿았다. 체온은 분명 따뜻했다. 라테스란이 조금 웃었다.
"울리지 않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타인에게 말을 건낼 때에는 늘 고민스러웠다. 어떤 말을 해야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제대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었는지는 불분명했다. 10년 동안 앙수즈와 알고 지내며 그에게는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침묵은 가장 좋은 휴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마음에 큰 변화는 없었다. 이사와 대화하며 부득이하게 알게 된 사실들은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입에 담지 않으며, 청년이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깔끔하게 묶은 꽁지머리와 남겨둔 옆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나도 노력할테니까?"
저가 죽더라도 딱히 앙수즈가 우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친구가 사고로 먼저 죽어버리면 그것도 못 할 짓이겠지. 일찍 안 죽겠노라 약속도 했고. 슬픔은 한 번에 강하게 밀려올수록 버티기 힘든 법이었으니. 청년은 그리 생각하며 다시 웃었다. 볕 들이쬐듯 마냥 다정한 미소였다.
(*오너님 괜찮으니 그냥 멘답해주세요..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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