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라테스란은 제 머리에 손을 얹어 보았다가, 그제야 자신이 모자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하지는 않은 자각이었다. 청년은 가만히 재앙의 꽃을 응시했다. 마법사가 되어 축하한다며 화관을 던지던 오르의 모습을 기억했다. 벅차오르는 감동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던 사랑스러운 모습도. 대견스럽다고 축하해주는 모습도. 그 모든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오르 님,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스승님. 부드럽게 닿아 살짝살짝 쓰다듬어주는 손이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졸랐을 텐데. 꽃부름 의식,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 그 모든 말을 오르 님께 고스란히 돌려드리고 싶었다.
껍질 깨지는 것처럼, 씨앗이 벗겨지는 것처럼 무너지는 육체를 보았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재앙의 꽃이 사방으로 뻗치는 모양새를 똑똑히 보았다. 변이, 변질. 몬스터로의 변화.
저 마법사가 되었어요, 오르 님.
그는 마기. 태양의 축복을 받은 최고의 전사. 디안시가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났을 때 몸에 차오른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힘을 내지른 첫 번째 대상이 당신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청년은 우울하게 재앙의 꽃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꿈틀대는 저것에 오르 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모욕이 아닐까. 라테스란은 어두운 안색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도 않아서인지, 기억은 뚜렷하게 몸에 새겨져 있었다. 싸웠다. 태양의 계시를 받고 몸에 힘이 흘러넘쳤다. 이리저리 뻗어오는 가지들을 자르고, 쳐내고, 뜯어내고. 오염이 퍼지지 않게 뛰며 적을 죽일 기세로 움직였다. 적은 몬스터. 눈앞의 괴물을 사살하기 위해서. ......그리 생각하며 싸웠다.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재앙의 꽃이 퍼진다면 죽을 사람이 너무도 많았고, 이곳에는 아직 각성하지 않은 벗들이 몇이나 남아 있었다.
새로 각성한 마법사는 총 열넷. 정령이 둘. 두 정령이 제 신의 가호를 땅에 뿌리고, 가호를 받은 네 명의 마기와 세 명의 워록이 싸우고, 세 명의 매지션과 두 명의 오라클이 벽을 치고 시야를 막았다. 그 사이 두 명의 소서러가 뛰어가 오르 님의 손을 붙잡고 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 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라테스란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그 이상의 좋은 방법은, 없었다.
아직은 꽃봉오리인 재앙의 꽃이 가지를 뻗고 오르 님의 방랑의 문을 넘어 세상에 뻗어 나가는 순간 그건 혈룡이나 카나쿠스보다 무시무시한 대재앙이 되겠지.
오르 님, 저는 당신의 손에서 생명을 받았는데.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멍하니 꽃을 응시했다. 죽음의 순간 사선을 넘던 라테스란을 붙잡아 준 따뜻한 손을 기억했다. 언제나 상냥하게 보살펴주던 목소리도. 부드러운 몸짓도, 언제나 다정하던 모습도. 이미 독립한 데다가 한 명의 어엿한 마법사로 각성한 청년이었으나 오르는 라테스란의 스승이었고 또한 또다른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소중하고 소중해서 평생을 귀하게만 여기고 싶은. 경애하는 스승님.
지금도 재앙의 꽃을 억누르기 위해 갓 각성한 마법사들도 전원 힘을 쓰고 있었다. 라테스란은 바닥을 한 번, 재앙의 꽃을 한 번 본 뒤 깊이 숨을 뱉었다. 오르 님, 오르 님.
당신의 몸에서 재앙이 싹터 피어난 순간 당신은 죽은 건가요?
당신은 재앙의 모판이 되어 사라졌나요?
저건...... 당신인가요? 그 안에 이성과 자아를 가지고 존재하나요?
그렇다면 그 모습으로라도 계속 살아가고 싶나요?
존재만으로도 재앙이 되어버린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르 님, 스승님.
우리의 어머니.
저는요, 오르 님...... 라테스란이 눈을 감았다. 흔들리지 않는 이성과 견고한 정신력. 타인에게 주는 상냥함...... 라테스란을 이루고 있던 감정들이 잘게 경련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황금뿔의 마기는 권위의 궤도를 걸어갈 자. 괴로워도 겉으로 티 내어서는 안 되고 슬프더라도 울 수는 없었다.
안녕히. 청년은 마음속으로 고별을 보냈다. 어떠한 길을 선택하더라도 당신은 죽었다고. 청년은 그 사실을 담담하게 인식했다. 예상치 못하고 갑작스러웠던, 그리고 참으로 비참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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