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에노아는 턱을 괴었다. 그 손에는 옅은 빛을 뿜는 카드 한 장이 쥐여져있었다. The Dream. 얻은지 얼마 되지 않는 이 따끈따끈한 카드는 그에게 새로운 꿈을 보여주었다. 파에노아는 일부러 이 카드를 이용해서 짧은 꿈을 꾸고 왔다. 책상에 엎드려서 잠깐 졸았다가 깬 정도의 가벼운 수면과 그보다 무거운 꿈이었다. 살짝 굳은 몸을 펴며 파에노아는 의자에 깊게 기댔다. 편한 옷차림의 그는 꽤 기가 찬 얼굴이었다.
방금 드림을 사용해서, 오늘, 어제, 그제...... 하얀 손가락이 하나하나 접혔다. 차곡차곡 손가락이 세어가는 숫자가 늘어날때마다 고운 미간에 주름이 지고 황금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허공을 응시했다. 벌써 열 번이 넘어갔다. 정확히 따지면 방금 전 드림으로 꾼 꿈이 열 번째였다. 이 정도면 스토커라고 불러도 될 정도라고요~. 정말이지 정도를 모르시는 건 어쩜 이리 변하질 않으신담...... 파에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높게 올려묶은 진파랑 색 머리카락이 낮게 흔들렸다. 그는 하얀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에는 몇 장의 카드가 흐트러지듯 놓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드는 아니었다. 약간의 흙과 나뭇잎으로 만든 환각. 실제의 카드는 얌전히 카드를 보관하는 책 속에 잠들어 있을 테니까. 파에노아가 손에서 때어놓기 무섭게 제 역할을 다한 드림 역시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파에노아는 카드들을 순서대로 나열했다.
가장 처음으로 클라우드. 친구가 되었던 순한 물 계열의 카드. 아무리 고작 카드에 불과한 인조생명체라지만 친구가 되자는 말이 선뜻도 나와서, 파에노아는 돌아온 뒤에야 새삼 긴장감을 느꼈었다.
그 다음으로 애로우. 무턱대고 공격해오던 강력한 불 계열의 공격 카드. 파에노아는 차라리 이 쪽이 나았다. 실제로 자신의 순발력은 그다지 높지 않은 터라 상당히 얻어맞기는 했지만, 공격과 방어는 익숙했다.
웨이브, 슬립. 파도를 치게 만드는 물 카드, 잠들게 만드는 어둠 카드. 어느 쪽도 활용도가 높은 카드였지만, 물 마법은 물론이요 어둠 마법도 파에노아는 그다지 솜씨가 좋지 않았다. 그가 자신있는 마법은 오롯하게 대지, 그리고 그나마 곁다리로 불을 조금 쓸 수 있는 정도였다. 같은 태양 계열인 빛 마법도 어설펐는데, 심지어 달 계열 마법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초등부 진급을 성공한 것도 파에노아는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이 이레이즈, 프리즈...... 파에노아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각 속 이레이즈를 가만히 쥐어들었다. 물체를 지우고, 인간의 기억을 지우고. 꽤 편리한 카드였다. 어둠 마법 실력은 여전히 부족했기에 파에노아는 이레이즈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없었지만, (사용한 뒤의 수습을 해낼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이레이즈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상태였다.) 그는 이런 마법을 몇 번이고 간절하게 원한 적이 있었다. 기억을 지워버리면 편할 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 파에노아는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 다음 쥔 카드는 프리즈였다. 자신을 쏘라고 말했던 외로운 카드. 그녀의 행위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파에노아는 그녀에게 화살을 쏘기에 그다지 망설임은 없었다. 카드들이 보관된 책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이성적인 판단과, 그대로 방치해봤자 언제 공격성을 발휘할 지 모른다는 경계심. 좋은 말로 구슬려 카드가 되었다면 최고였겠지만, 그게 불가능해진 이상 그 다음 선택할 수 있었단 차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아이들은 좀 더 마음아파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는 카드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녀가 환각으로 겉모습만 흉내낸 카드는 얌전하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 포획한 카드가 방금 사용한 드림, 그리고 바로 이 카드. 실드. 파에노아는 장미덩쿨에 감싸인 자물쇠가 그려진 카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방패의 카드. 얼마나 강한 마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적의 방패가 될 수 있는 강인한 카드...... 라고, 설명을 들었다. 듣는 내내 어찌나 설레던지. 파에노아는 실없이 웃으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총 합하여 여덟 장. 벌써 꽤 많이 모은 셈이었다. 중등부의 진급도, 어쩌면 코앞까지 다가온 셈이었다. 그는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플라네타Planeta는 오래된 가문이었다. 덕분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도, 가문에서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법률도 있었다. 심지어 그 법률은 가문 내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이라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불경할지는 모르겠으나 신을 믿는 가문은 아니었으니...... 어린 그는 그 법이 퍽 번거롭다고 생각했으나, 파에노아는 그 규칙을 지켰다. 의외로 아주 철저하게 지켰다. 심지어 법률이 제한하는 나이를 넘어도 전통까지 꼬박꼬박 지켜주었다.
지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로는, 굳이 꾸역꾸역 어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둘째로는, 교육은 엄격했지만 하루종일 저를 끼고 사랑해주던 증조부에 대한 애정. 그는 오래 나이먹은 만큼 전통과 율법을 중시했고, 어린 증손자를 사랑했다. 파에노아는 그의 애정을 받고 그의 사상에 공감하지 못할지언정 이해하고 납득했다. 이미 노환으로 거동조차 힘든 증조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얌전히 그가 원하는 모습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증조부는 이미 부친이 법칙만을 지키고 전통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크게 실망했기에, 파에노아는 그 생전만큼은 전통도 지켜주는 게 옳겠노라 여겼다. 갓난쟁이 시절부터 저를 끼고 온갖 지식과 세상의 이야기를 귀에 속삭여주던 혈육을 위해서였다.
그는 오랜만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누르는 번호는 익숙했다. 연결음은 짧았고, 상대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버지~?"
[아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온화하고 다정했다. 그는 가족이 부르는 제 애칭을 아주 오래간만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에노아는 제 아버지의 목소리를 퍽 좋아했다. 그는 제 옆머리카락을 살살 꼬며 물었다.
"새벽 늦게 죄송해요. 가족들은 다 잘 지내나요?"
[네가 안부 전화라니, 별 일도 다 있구나. 그래, 다 잘 지낸다. 걱정할 것 없어.]
"증조 할아버지는 여전하세요~?"
[그래.]
파에노아가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갈 즈음 노환으로 쓰러졌던 그의 증조부는 그 뒤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도 소용이 없었고, 사실 증손자가 16살 먹을 순간까지 살았으니 수명이 다했다고 해도 되겠지만. 파에노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옆머리카락을 한참을 꼬며 침묵하던 그는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꿈에 나오시더라구요~. 예전에는 띄엄띄엄 나오셨는데, 요즘엔 계속 나오세요. 매일 밤."
[그러냐? 널 그렇게 예뻐하시더니, 이럴 때도 너한테 가시는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벌써 열 번이나 오셨어요. 의자에 팔을 괴고 그가 웃었다. 꼬고 앉은 다리 끝을 살살 움직이며 파에노아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귓가 가까이 가져다 댄 휴대전화는 조금 따끈했다. 그는 전화를 스피커 모드로 변환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계속 나오셔서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 지 아세요~?"
[알 것 같구나.]
"맞춰보실래요?"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겠지. 파에노아 아스트라 플라네타. 전통을 지키거라. 가문의 가훈을 잊지 마라.]
"정답~."
[그리고 네가───,]
"......그것도 정답."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오늘에서야 말하신 건데. 파에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반대쪽 전화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네 또래 무렵에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옅은 추억과 짙은 쓸쓸함을 담고 있어서, 파에노아는 조금 쓰게 웃었다. 옅은 한숨을 삼키며, 그는 결국 하려던 말을 끝마쳤다.
"......증조 할아버지한테, 말 좀 전해주실래요~? 죽었다 다시 깨어나는 한이 있어도 전통도 가훈도 제대로 지킬 각오를 오늘 다졌으니......"
파에노아는 책상 위에 올려둔, 자신이 만들어낸 가짜 카드들을 모두 치워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손에 들었다.
"이제 걱정하실 것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 알았다.]
쉬려무나, 아스. 다정한 맺음말에 파에노아도 그와 비슷한 말로 답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또 전화할게요. 전화는 금방 끊어졌다. 파에노아는 책상 위에 엎드려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천천히 눈을 떴을 때, 황금빛 눈에 비춘 건 날이 선득하게 선 날카로운 가위였다. 그는 곧 망설임 없이 그를 손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