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몸에 베인 습관대로 눈을 떴다. 창밖은 여전히 어스름한 어둠이 깔려 있었고 방 안은 여전히 밤의 정적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는 어렵잖게 지평선 너머 해가 뜨고 있음을 알았다. 생명의 근원에서부터 부드럽게 미풍이 부는 감각은 청년이 가장 좋아하는 감각 중 하나였다. 털이 복슬한 귀가 가볍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태양에게 사랑받는 신관은 하루가 돌아 다시 저에게 찾아온 힘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한 번 달아난 잠이 은근슬쩍 다시 몸을 비비기 전에 청년이 몸을 일으켰다. 짙은 색 몸을 감싸고 있던 얇은 이불은 터럭처럼 흘러내렸다. 잠자리 날개처럼 부드러운 것을 침대 위에 깔끔하게 정돈한 뒤, 청년은 그대로 방에 딸려 있던 욕실로 직행했다.
털 달린 네발짐승 드워프의 특성 상 라테스란은 제 귀나 털에 물 닿는 것을 썩 즐기지 않았다. 몸을 씻는 것은 좋아했지만, 약하고 여린 살결에 자극이 가해지는 것은 꺼려했다. 덕분에 욕실에 들어온 청년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두툼한 수건으로 뿔과 귀를 요령 좋게 둘둘 감싸는 일이었다. 수건 속에서 귀를 까딱여보아도 잘 묶인 그것이 풀리지 않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라테스란은 물을 틀었다. 카즈카지트는 바닷가인데다가 무역의 중심이라는 대도시인 덕분에 수도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매일 기분 좋게 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청년은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짙은 색 몸은 그 자체로도 예술품이라 불리기에 무리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타고난 신체에 신께 받은 축복, 거기에 덧붙여 노력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는 황홀했다. 갸름한 얼굴에 잘 벌어진 어깨, 그에서 흘러내리는 팔의 곡선이나 가슴의 곡선이 도톰했다.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는 매끈한 허리며 그대로 이어지는 곡선에, 단단한 허벅지와 오목한 발뒤꿈치까지 청년은 유려하게 아름다운 조각상 같았다. 크고 근육질이기는 하나 비율 탓인지 퍽 예쁘게만 보여서, 일방적인 사람들이 상상할수조차 없는 근력이 뿜어져나온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몸을 보고 있는 유일한 대상이 청년 자신뿐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그러한 제 육체에 썩 관심이 없다는 점이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무심한 손길로 몸을 씻어내리고, 따로 귀와 머리를 꼼꼼하게 감은 청년이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황금빛 뿔을 깨끗하게 관리했다. 뿔 관리를 마지막으로 두툼한 가운을 걸친 청년이 곧 욕실을 나섰다.
부유하게 살기 시작하면서 청년은 제 집을 만들 때 설계부터 크게 신경을 썼다. 덕분에 그의 침실에 딸린 방만 세 개가 넘었다. 의상실로 들어가 매일 주름 한 점, 먼지 한 톨 앉지 않게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정복을 차려입은 라테스란은 그대로 방에 이어진 기도실로 향했다. 집의 가장 높은 곳, 태양이 잘 보이도록 동쪽과 남쪽은 아예 창문으로 벽을 채운 방이었다. 하늘은 이제 어둠이 가시고 옅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제 곧 까마득하게 몸을 높일 태양은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찬란해지겠지만, 지금까지는 가까스로 눈에 담을 수 있을 밝기였다. 제단 앞에 무릎 꿇은 청년이 눈을 감았다.
그의 삶은 언제나 태양신과 여신, 두 신께 올리는 기도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정식으로 예를 차려 기도하는 시간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과 해가 저무는 저녁, 두 번에 한정되어 있었다. 태양에게 사랑받는 태양신의 마법사, 황금의 마기의 기도는 목격만으로도 신앙심을 차오르게 만드는 신실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시대에 부활한 마기는 총 넷이었지만, 그 중 스스로를 태양의 신관이라 지칭할 정도로 신을 경애하는 마기는 그 하나가 고작이었다. 청년은 동생들 몫까지 자신이 섬기면 된다고 웃어 넘기기만 했다. 그리고 진실로 그리 행동했다.
기도는 길지 않았다. 십 분 남짓 기도하던 청년이 천천힌 눈을 떴다. 선연한 황금빛 눈동자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빛났다. 기도를 끝마치자 정복을 갈아입고 자주 입는 편한 평상복을 걸쳤다. 흰 천과 붉은 비단, 그 위에 금으로 새겨진 자수가 그 육체를 감쌌다. 흰 정복을 입었을 때 풍기던 금욕적인 분위기가 폭죽처럼 변했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장신구가 늘어뜨려지고, 적당히 묵직한 무게가 내려앉고 나서야 라테스란은 제 방 문턱을 넘었다. 새벽이 가시고 아침의 시작이었다.
***
“좋은 아침, 형.”
“그래. 너도 좋은 아침, 튜드.”
부드럽게 웃는 제 동생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라테스란도 다정하게 아침인사를 건냈다. 세븐즈헤븐의 특성 상 남매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우연의 극치로 셋 다 눈에 황빛이 돌았다. 우긴다면 얼마든지 닮았다 찬사를 들을 수 있는 녹황색 눈동자가 제 형과 비슷하게 곡선을 그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매일을 보내는 세르리움 삼 남매였지만 그만큼이나 우애는 돈독했다. 동시에 두 동생들은 라테스란의 가장 믿음직한 부하들이기도 했다. 제 자리에 앉아 오늘치 서류를 몇 장 들여다보는 라테스란에게 튜렐루드가 몇 장의 편지를 책상 위에 나열했다. 그가 따로 확인하고 정리한 것들 중, 라테스란이 확인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이건 마기 몬테 님에게서, 이건 소서리스 오첼 님에게서 온 거야. 이 쪽은 왕실에서 온 거고. 그리고 이건......”
매끄럽게 이어지던 튜렐루드의 말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하고 수그러들었다. 서류에 시선을 두고 귀만 세우고 있던 청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형의 모습에 튜렐루드가 편지 하나를 더 내밀었다. 편지봉투는 무늬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보다는 질이 떨어졌다. 라테스란이 흔히 받는 편지들보다 초라한 티가 났다. 허나 청년은 제 동생의 판단력을 의심없이 믿고 있었기에, 그가 설명해 줄 말을 침묵으로 기다렸다.
“이건 아스타리움이라는 작은 촌락에서 온 편지야. 카즈카지트 북서쪽에 있는 곳인데, 혹시 알아?”
“아스카리움? ......아아,”
짧게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던 청년은 곧 느즈막한 탄성을 뱉었다. 청년의 고개가 부드럽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튜렐루드는 편지를 뒤집어 보낸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받는 이의 이름에는 라테스란의 이름 넉 자만 얌전히 박혀 있었다. 세르리움의 성이 붙어 있지 않은 것까지 확인하며 라테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쿠스의 일족과 벌어졌던 전쟁에 처음 참전했을 때 배정받은 보호 구역이었지.”
“응. 편지 읽어 보고 싶을 테니, 30분 정도는 비워 줄게.”
딱 30분만이야. 튜렐루드는 상냥하게 도장을 찍었다. 서류를 챙겨 문을 나서는 남동생의 뒷모습을 라테스란은 퍽 머쓱하게 응시했다. 튜드와 아델, 그의 두 동생들은 그들을 두고 위험한 전쟁터로 나섰던 라테스란을 이해하고 용서했으나 토라진 기색은 결코 숨기지 않았다. 지금의 태도도 그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몬테와 오첼의 편지도 궁금했지만, 라테스란은 제일 먼저 아스타리움의 편지를 뜯어 읽어내렸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빼곡한 감사의 인사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종종 받은 적 있는 흔한 감사였으나 라테스란은 보잘것없이 묘한 감정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축복 어린 감사를 받기에, 첫 전쟁을 형편없이 보냈노라 생각하고 있었다. 시선이 어스름하게 활자를 헤매다가 천천히 추억에 잠겼다. 느릿하게 그 시절을 되짚는 시선이 퍽 온화했다. 모든 일이 안전하게 매듭지어지고, 다 자란 지금에서야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는 가혹한 시절이었다.
그곳은 작은 촌락이었으나, 카즈카지트 근교라는 지리적인 특징으로 인해서 계절사와 병사들이 상당수 투입된 군사보호지역이었다. 상업을 잠시 내려놓고 계절사를 본업으로 잡아 전쟁에 발을 담근 풋내나는 22살 청년이 가장 먼저 배정된 전장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 때도 그럭저럭 자랐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어설픈 애송이였다. 마음의 준비 하나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심 얼어있던 자기 자신을 모를 리 없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 라테스란은 전쟁의 흔적으로 피폐해진 땅과 사람들을 처참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그 모습은 평범한 불행이었고, 도리어 병사들과 계절사들에게 생명을 보호받는 입장이다 보니 다른 소규모 촌락보다도 훨씬 처지가 좋은 곳이었으나 청년은 그 평범한 불행에 비극을 느꼈다. 일상처럼 불행이 깃들어서 그의 평범함과 특별함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이 가혹했다.
그 매정함에 마음이 아팠고, 그렇기에 싸우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전쟁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호락호락하지 않았었다. 오르의 아이들이라는 이름값 덕분에 대우받았으나 그만큼 싸움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는 전쟁터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장소, 가장 가혹한 위치에 서야만 했다. 갓 성인을 넘은 애송이를 사지로 밀어넣는 꼴이었으나 그만큼 병사들도 정신적으로 내몰려있었으니 그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청년은 제 자리를 배정받은 바로 다음 날, 잘 벼려진 칼을 손에 잡고 싸워야했다. 선득하게 갈린 칼이 피와 살점에 절어 나무 하나 제대로 잘라내지 못할 정도로.
카나쿠스의 일족과 싸우면서 제 약한 모습을 티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라테스란은 충분히 선전했다. 저 아닌 다른 생명이 죽어가는 꼴을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생명을 앗아가는 주체가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속이 끓고 토악질이 나오는 것을 애써 삼켰다. 그의 육체는 강인했기에 정신의 나약함을 티낼 수 없었다. 생존을 원하는 생명체들이 오밀조밀하게 청년의 등 뒤에 모이고 있었으니까.
제 옆에 서 있던 병사 일곱을 브레스 한 번에 잃어버린 뒤에야 죽이지 않으면 대번에 빼앗기는 공간이라는 실감이 왔다. 그 뒤로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일족과 몬스터를 죽이고, 또 죽이고, 죽이고. 죽이지 못해서 잃어버리고. 비명만 가득한 그곳은 지옥이었다. 라테스란은 첫 전투를 치른 그 날 밤에서야 자신이 스스로 지옥에 걸어들어왔음을 시인했다.
그 날만큼 슬픔에 빠져 하염없이 울음을 터트린 날도 없었다. 오르의 아이들이라는 명패 덕분에 특별히 막사 하나를 지급받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막사 밖으로 울음소리가 흘러나가 혹 불침번들이 들을까, 사기라도 떨굴까 저어되어 볼품없는 이불을 깨물며 울었다. 잘못하여 이불을 찢기라도 할까 울면서도 보잘것없는 걱정에 종종대던 꼴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웠지만 그 때는 다급하기만 했다. 눈가에 발갛게 열이 오르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해야 할 정도로 오래 울었다. 오염되어 몬스터가 되어가던 오르 님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부모님이 보고 싶은 밤이었다. 운 좋게도 같은 전장에는 럭이 있었고, 라테스란은 그에게 위로받은 뒤에야 제대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슬픔을 품에 안고 의지에 녹처럼 달라붙은 모든 것들을 갈아 떨어트릴 수 있었다. 청년은 그 때 어떠한 방향으로 한 걸음 성장한 셈이었다.
힘겨운 시기였지. 라테스란은 편지를 덮고 조금 웃었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얼굴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는 그리움과 메아리처럼 돌아온 옅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 때의 어설픔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 때 울지 않았다면 훨씬 괴로웠을 터. 하지만 그 때 잃었던 동료들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적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것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라테스란은 편지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잔뜩 달아오른 아델이 늦었다며 문을 벌컥 열어젖힐 그 순간까지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