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힘이 자고 있는 방은 고요하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소년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물끄러미 그 방문을 응시했다. 황금색 눈동자는 평소의 온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서늘했다. 썩 날카롭고 서늘한 인상의 소년이 무표정하게 서 있으니 답지 않게 우울한 위압감까지 들었다. 울지 않으니 걱정 말라며 오물오물 호박파이를 먹던 작은 일각수 소년은 완전히 앓아 누워있었다. 오르 님은 괜찮다고 말씀하셨고, 함부로 위험한 곳에 간 벌로 머리에 가지를 꽂고 도롱이벌레가 되어서 잠들어 있는 엘로힘은 그녀의 말대로 정말 괜찮을 터였다. 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은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라테스란은 아이의 부상에 크게 상심했다.
소년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본디 본인의 책임과 별개로 곱게 키우고 싶었던 아이가 상처입으면 속이 상하기 마련이었다. 라테스란이 느끼는 감정 역시 꼭 그와 같았다. 엘로힘은 어렸고, 라테스란에 비해서는 신체적으로 한참은 더 약했다. 물론 심지는 튼튼하다 못해 어지간한 것들을 다 씹어먹을 정도로 배짱 좋았으나 그래도 걱정되는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소년은 쳐진 제 귀를 숨기지도 못했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어린 일각수 소년은 뿔에 가지를 끼운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소풍은 데려갈 터이지만 (짐상자 같은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테스란은 저가 잘 업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안던가. 그도 아니라면 유모차(!)같은 선택지도 있었다.) 아마 점심때까지는 일어나지 못하겠지. 소년은 가만히 침대 위에서 숨을 내쉬는 소년을 응시했다.
통증은 싫다. 아픈 것도, 괴로운 것도 싫었다. 라테스란이 위험한 길을 지양하고 기사의 문이나 현자의 문. 즉 마법사가 있어서 몬스터가 전혀 나오지 않는 문만 드나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몬스터랑 만나서 다치기 싫으니까. 오염되기 싫으니까. 그건 나약함이기도 했고 공포이기도 했다. 병마에 시달렸던 소년은 죽음이 끔찍하게 싫었다. 약해지는 것도 싫었다. 진저리가 났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고, 이명이 들리고 피가래가 끓어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감각은 지금까지도 악몽에 나왔다. 식은땀에 푹 젖어서 잠도 못 자고 나무 위를 서성거리던 순간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게 더 싫구나. 작게 중얼거린 소년은 약하게 결심한 눈으로 물끄러미 엘로힘 응시했다. 다쳐서 앓아 누워 있는 친구를 보는 쪽이 백 배는 싫었다. 저 자신도 약해 빠졌지만 몬스터와 만나서 싸워보는 경험 한두 번은 필요하겠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침대에 가까이 다가간 라테스란은 그 베개 옆에 조그마한 인형을 하나 내려놓았다. 흰 천으로 만든, 엘로힘의 고양이를 닮은 하얀 고양이 헝겊인형이었다. 쾌유를 바라는 기도를 한 번 올린 소년은 그대로 문을 닫고 기척 없이 나갔다.
(1029)
'Fantasy > Lattel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일, 라테스란, 축제 (0) | 2018.02.03 |
---|---|
2일, 오첼, 소망 (0) | 2018.02.02 |
2일, 이사, 식사 (0) | 2018.02.02 |
1일, 같은 조의, 부적 (0) | 2018.02.01 |
1월, 하르데이네, 수국과 등나무 (0) | 2018.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