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스란은 물끄러미 하늘을 보았다. 시간은 꽤 늦었고, 이제 주변도 썩 한적했다. 밤낮 할 것 없이 시끌벅적한 친구들이야 많았지만 그가 있는 곳까지 시선을 두지는 않았다. 밤하늘에 덮여 기척도 없었다. 쉽게 올라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 라테스란이 균형 좋게 올라와 있는 이곳은 세피로트의 거대한 가지 중 하나. 제 침실의 창문 바깥으로 나와서 벽을 조금 더 기어 올라 나뭇잎이 가득 달린 가지 중 하나를 골라 잡아 만든 장소였다.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지만, 라테스란은 산양의 속성을 가진 드워프. 높은 곳을 올라가거나 균형 잡기에는 탁월한 센스가 있었다. 소년이 몇 번 눈을 깜박이고는 가지에 털썩 앉았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소년은 종종, 오르 님에게만 행방을 이야기하고 여기에 온 적 있었다. 보잘것없는 비밀장소였다.
꼬리가 길게 살랑였다. 오늘은 그다지 한 일도 없는데 지나치게 한 일이 많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녁의 일이 지나치게 임펙트 있었다. 스승님이 열어주신 세 개의 문. 하나는 기도, 하나는 모래, 마지막 하나는 현자. 현자의 문은 스승님과 이어지는 문이라 위험 따위 없다고는 하지만 모래의 문과 기도의 문은 위험하다고 들었다.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 생명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라테스란은 제 몸상태를 그럭저럭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것도. 늘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기는 했지만, 꽤 빠른 성과였다. 소년은 자기 자신에게 약간의 의문을 품었다. 마력이 강해지고 세상의 선한 법칙이 좀 더 잘 보이고 조금 더 영리해지고 신체가 튼튼해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애송이. 오드를 운용하는 방법이나 체계적인 무술실력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 어버버하는 꼴이었다. 라테스란은 제 방문 손잡이라도 실수로 부술까 무서웠다.
스승인 오르 님과 에크웨시 님은 저의 성과를 그럭저럭 좋게 보아 주셨기에 문을 열어 주셨지만, 라테스란은 그 사실을 알고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기쁨과 감동도 느꼈지만 그만큼 무거운 무게도 느꼈다. 위험한 문을 일찍 열었다가 혹시라도 친구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온몸에 핏기가 다 빠지는 착각이라도 들었다. 제 친구들이 위험하고 무모한 짓은 안 하리라는 믿음도 있었지만 대담하게 도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역시 한구석에 있었다. 라테스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10. 좀비는 20. 크리스탈 스콜피온은 100. 좀비까지는 이길 수 있다. 허나 크리스탈 스콜피온은 만나는 순간 그냥 죽었다를 복창해야겠지. 스승님은 강하셨는데. 라테스란은 달을 보며 조용히 눈을 빛냈다. 오르의 활, 에크웨시와 로제타의 힘. 좀 더 연륜있고 실력있는 존재의 힘. 라테스란은 깊은 존경과 동경을 느꼈다. 정말로 멋있었다.
조금 더...... 소년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과거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던 연약한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이 모든 것은 오르의 덕분이었다. 자신을 주워 주고 치료해 준 상냥한 마법사. 갈 곳 없이 황망해진 자신을 너그러이 거두어주었고, 그렇기에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라테스란은 언젠가 이곳을 독립해야 한다는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이곳을 지극히 사랑했다. 이곳의 사람들도 사랑했다.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소중하고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다. 행복해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조금 더. 황금의 눈동자는 별보다 빛났다. 달빛을 받은 뿔과 은빌의 머리카락이 환하게 반짝이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마법사가 된다는 예언이 내려온 순간부터 라테스란의 독립 후 미래계획은 조금 길을 틀어버렸지만, 틀어진 길의 끝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저번만큼이나 멋들어졌다. 그럴듯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본디 목표란 높게 잡는 법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길을 조금 돌아가더라도 저를 너그러이 보아주세요. 그 아이들이 저를 용서해주기를 감히 바라지는 않습니다. 라테스란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면 언제나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 두 분의 얼굴이었다. 또 저를 보는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 침대에 누워 피를 토하던 여리고 약한 꼬마. 예쁘장하게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던 어린아이. 그러나 그 때에도 정신력 하나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꿋꿋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독한 꼬마였다.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자랄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본디 책임져야 할 것, 갈 곳 잃은 순간부터 짊어져야 할 것. 그 위에 마법사의 의무가 더 얹어지더라도 소년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 걸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조금 더 강해져서. 내 등 뒤의 사람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상을 지키는 위대한 마법사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작은 범위겠지만, 라테스란은 그 하나만큼을 간절하게 소망했다. 제 앞의 적이 누구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었고, 물러서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지고 싶었으며, 애초에 적을 만나지 않을 만큼 현명해지기를 소망했다. 소년의 귀가 가볍게 까딱였다. 꼬리는 부드럽게 살랑였다. 좋은 밤이었다. 라테스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침실로 들어가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잠들 생각이었다. 오늘은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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