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앙수즈, 돈

2018. 2. 8. 18:51 from Fantasy/Lattelan




 소년에게 돈은 그다지 가치가 없었다. 


 라테스란은 앙수즈가 나간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제 침대에 앉았다. 하얀 산양의 귀가 위아래로 부드럽게 살랑였다. 소년의 시선은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쪽 벽을 빼곡하게 채우는 수조에.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돌멩이들에게. 소년이 노력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깎아 조각해놓은 그것들은 물 속에서만큼은 보석 못지않게 반짝거렸다. 금빛의 눈동자가 말갛게 그를 담았다. 깜박깜박. 


 걸리면 죽는다는 병을 얻고도 목숨 부지하고 질기게 버텼던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머리로 알았지만, 그렇다기에 소년의 주변에 반짝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손길 닿는 곳, 발길 닿는 곳, 눈길 닿는 곳이 온통 황금으로 번쩍거린다면 황금의 가치는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짝거리는 예쁜 것. 그래서 마음 한구석을 흔흔하게 만들어주는 금속. 라테스란에게 돈은 고작 그런 물건이었다. 가치를 느끼기에 소년은 타고나기를 지나치게 운이 좋았다. 


 천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속에서 깨어난 라테스란은 탄생부터 보석을 쥐고 태어났다.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맘에 차는 돌을 주워 닦으면 열에 셋은 진짜 보석이었다. 아직 아기 산양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던 유아기에도, 겨우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뿔도 나지 않던 어린 아이 시절에도 라테스란은 늘 귀한 것을 쥐고 살았다. 심지어 처음으로 열이 오르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토하며 침대에 눕게 된 순간마저도 소년은 원석을 깎으며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은 첫 아이를 끌어안고 사랑하여 어쩔 줄 몰랐고 두 동생들은 침대에만 누워있는 장남에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종알대며 사랑스럽게 웃어주었다.

 양손에 행운을 쥐고 태어났어. 라테스란은 자신을 가리키며 소근거리는 그 목소리들을 모두 긍정했다. 잠을 자다가도 통증과 열에 들떠 손을 헤메면 그것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고, 뺨에 입맞추며 아프지 말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병을 제외하면 소년은 행복했다. 이 세피로트에서 소년보다 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아이도 드물 터였다. 매일 죽음을 선고받고도 지금처럼 자랄 수 있던 건 아이의 타고난 천성이기도 했지만 가족들의 힘이기도 했다. 라테스란은 병에 걸려 돈 잡아먹는 귀신이 된 자신을 놓지 않고 부유하게 키워 준 부모님께 아직까지도 감사했다.



 그런 라테스란에게, 앙수즈는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르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색이 잘 어울리는 소년은 어떤 의미로 라테스란과 극단에 서 있었다. 미려하게 웃는 앙수즈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년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새하얀 속눈썹이 짙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돈이 있으면 배고프지 않아도 되고, 춥지 않아도 돼요.'


 맞는 말이다. 맛있는 것도 따뜻한 옷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경제관념은 부족해도 상식은 있었다. 


'제대로 갖춰 입고 인간답게 얘기도 나눌 수 있지요.'


 돈은 앙수즈에게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던가. 라테스란은 그 말을 듣고 그 생각을 했다. 인간다운 생활에는 돈이 필요했다. 앙수즈는 그렇기에 돈을 원했다. 지금의 오르처럼 번듯하고 제대로 된 보호자가 없이 어린아이가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를 위해 어떻게 살아왔을까? 침대에서 일어난 라테스란이 방을 조금 서성였다. 아프지 않은 평범한 아이가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르는 라테스란이 앙수즈의 성장과정을 그럴듯하게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속이 상했다. 

 앙수즈는 열 여섯 살이었고, 라테스란의 첫째동생보다도 어렸다. 하얀 귀가 땅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는 감히 동정하는 일인가? 소년은 또 고민했다.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정확한 마음도 모르면서 건방지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소년은 사랑받고 자랐기에 마음의 고난을 잘 몰랐고 병들어 자랐기에 평범함에 대한 제단이 모자랐다. 늘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앙수즈는 유쾌해 보였다. 채집으로 아예 지쳤을 때가 아니면 자주 웃었다. 그게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도. 라테스란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앙수즈의 뒤를 쫒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라테스란은 그를 불렀다. 


"아이나르."

"? 뭔가요? 물어볼 거라도 있나요?"


 앙수즈가 뒤돌아 라테스란을 보았다. 어리둥절해보이는 그 얼굴을 보며 라테스란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짧은 망설임 끝에 라테스란은 천천히 저 혼자 담고 있던 과거과 미래의 계획를 꺼내들었다. 앙수즈가 자신의 과거를 조금 말해주었으니, 자신도 말해주어야 비등했다. 


"저는 곧 이 세피로트에서 독립해 나갈 겁니다. 아마도 성인이 되면 곧장."

"오호, 그런가요?"

"나가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상회를 다시 만들 거에요."


 잃어버린 이름이지만. 소년의 꿈은 부모님이 이끌어간 상회를 그 때보다 더 거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서머데일에서 가장 이름 높아질 수 있도록. 부모님의 꿈이었고 지금은 라테스란의 꿈이었다. 그 외에도 하나 더 있었으나, 라테스란은 그것까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목에 건 황금 열쇠를 잠깐 매만진 소년이 다시 앙수즈를 응시했다. 황금의 눈동자가 피하지 않고 선연한 사파이어 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나르. 만약 당신이 이 세피로트에 나왔을 때 갈 곳이 없으면 제게 오세요."


 앙수즈는 유능하고, 경박하고 방정맞지만 라테스란은 소년을 믿었다. 아. 혹여 무슨 오해를 할까 싶어 소년은 덧붙였다. 


"내가 아이나르를 고용할테니까."


 대가는 얼마든지 치를테니, 나를 위해 일해줘요. 하고 싶은 말이 그대로 입에서 나왔다. 라테스란은 부모님이 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많이 보았으나 실제로 상업에 뛰어들어 보지는 않은 풋내기였다. 그보다 앙수즈가 훨씬 잘 알고, 훨씬 유능할 터였다. 할 말을 다 한 뒤에야 좀 머쓱해진 라테스란이 가볍게 뺨을 긁적였다. 괜한 말을 했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제 말을 무르지는 않았다. 만약의 일이지만요. 소년이 살짝 덧붙였다. 앙수즈에게 다른 미래의 계획이 있다면 상관 없었다. 다만 그의 앞에 새로운 길의 방향을 하나 제안한 것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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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님 멘답하셔도 괜찮아요 그냥 애가 할말하는 것 뿐이랍니다(목짤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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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빛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