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엘로힘, 호박파이
라테스란은 주방에 섰다. 이제 여기가 제 자리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하기야 하루에 몇 번이나 이곳에 오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재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가 만들고자 하는 요리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스치고 지나갔다. 온갖 달콤한 먹거리들이었다. 식사보다는 간식 느낌으로. 라테스란은 무엇을 만들지 고민했다.
마시멜로를 넣은 코코아, 딸기와 베리류가 가득 들어간 파이, 청포도를 빼곡하게 얹은 타르트, 초콜릿을 듬뿍 쓴 케이크. 그도 아니라면 뭐가 좋을까. 고소한 맛이 일품인 떡이나 이리저리 졸여 만든 약과같은 것도 괜찮을 터였다. (이 모두는 미라에게 배운 과자들이었다.) 엘로힘은 주는 만큼 정말 잘 먹는 착한 아이였기에 라테스란은 도리어 고민스러웠다. 무언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다면 그를 만들어줬을텐데. 엘로힘은 편식도 잘 안 했다.
라테스란의 시선이 방금 손질한 호박에게 닿았다. 늙은 호박은 무게가 묵직하고 잘 익어 달짝지근했다. 라테스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걸 쓰면 되겠다. 메뉴는 호박파이로 결정이었다. 소년은 호박을 들어 망설임없이 칼로 서걱 잘랐다. 쩍 갈라지는 소리가 호쾌하게 들렸다. 호박을 잘 잘라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속을 파내고 껍질을 벗긴 뒤 잘게 썰어 먹음직스럽게 쪘다. 호박 찌는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다. 고구마를 쪄도 맛있겠는데. 잘 쪄지는 호박을 보며 라테스란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 다음에는 고구마에 흰 우유를 준비해야지. 소년은 다음을 기약했다.
잘 쪄진 호박을 볼에 담은 뒤 숟가락으로 잘 으깼다. 으깬 것 안에 설탕과 우유, 소금, 베이킹파우더, 밀가루와 계피가루, 견과류 가루를 함께 넣어 잘 섞으면 파이 안에 넣을 필링은 완성이었다. 비율과 정량만 잘 맞추면 누구나 맛있게 만들 수 있었다. 라테스란은 손을 숟가락에 남은 필링을 살짝 먹어보고 만족했다. 괜찮은 맛이었다.
그 뒤에는 파이지를 만들어야 했다. 볼에 박력분과 차가운 버터, 소금, 베이킹파우더와 물을 넣고 잘 주물러 반죽을 만들었다. 봉지에 넣어 찬 곳에서 1시간 남짓 휴지시키고, 꺼내어 밀대로 길게 밀었다. 늘러붙지 않게 재빨리 반죽을 밀고 파이지를 만들어 틀에 넣고, 모양을 잡았다. 행동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포크로 구멍을 왕창 뚫어두어 파이지가 부풀지 않게 방지해두고, 안에 필링을 적당하게 채웠다. 구웠을 때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가득 필링을 넣은 뒤 다진 호두를 조금 넣고, 미리 예열해 둔 오븐에 넣어 굽는 것으로 끝. 라테스란은 오븐에 파이가 구워질 동안 뒷정리를 했다.
깔끔하게 치우고 나서 느긋하게 우린 커피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파이는 잘 구워졌다. 노릇노릇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뜨겁기보다는 차게 먹어야 맛있기에 씹었을 때 쫀득해질 정도로 잘 식혔다. 라테스란은 다 만들어진 파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예쁜 그릇을 하나 꺼내 그 위에 파이를 올리고 그럴듯하게 플레이팅했다. 눈으로 보기 좋아야 먹을 때 만족스러우니까.
음료는 뭐가 좋을까. 역시 밀크 티? 하지만 엘로힘은 아직 어리니까 그냥 우유도 괜찮은데. 라테스란은 고민 끝에 우유를 선택했다. 이게 더 잘 넘어갈 것 같았다.
엘로힘에게 찾아가서 파이를 건내주기까지 크게 헤매지 않고 도착했다. 누군가를 찾는 일은 어렵지도 않았다. 냄새로 알아차리기도 쉬웠고.
그 독주, 선혈의 왈츠를 만든 엘로힘이 얼마나 놀랐을 지 라테스란은 그럭저럭 짐작만 했다. 어찌 감정을 고스란히 읽겠냐만은 풀죽고 놀라워하리라고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도 않았다. 소년의 하얀 귀가 하늘로 향했다가 얌전히 가라앉았다. 엘로힘이 크게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라테스란은 호박 파이를 준비했다. 엘로힘이 저를 보는 모양새를 보며, 라테스란이 엘로힘의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잘 만들어진 호박 파이가 수줍게 그곳에서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엘로힘을 위해 만든 거랍니다. 먹어 줬으면 좋겠어요."
혹시 많이 울었나요? 라테스란의 시선이 엘로힘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황금빛 눈동자가 조금 시무룩하게 하얀 얼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