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꽃
들꽃처럼 여린 소녀와 나무처럼 억센 청년은 얼핏 보기에 참으로 다정한 사이였다. 달콤한 크림처럼 상냥하고 다정하며 맑은 소녀는 제 짧은 보호자를 존중하여 사랑해줬고, 뻣뻣하니 튼튼한 청년은 제 짧은 피보호자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해주려 애썼다. 어떤 미래를 손에 거머쥘 지 모르는 씨앗을 최대한 자유롭게 풀어두려 애썼다. 강산은 언제나 여린 풀을 키우는 데에 서툴러서, 차라리 자신이 아닌 제 포켓몬들과 자유롭게 풀어두는 게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났기 때문에. 몇 없는 경험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자유롭게 클 수 있도록, 건강하게 클 수 있도록, 자기 하고 싶은 그대로 클 수 있도록. 그리하여 찬란하게 반짝일 수 있도록. 행복하도록.
순진하리만치 곧은 애정이었다. 허나 타고나기를 무디고 둔하게 태어난 청년은 소녀가 몰래 아이들에게 속닥였던 것처럼, 그는 나무를 가장하고 있는 바위인지라. 자신이 속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아낌없이 말하지 않았다. 사실 말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랬으니까. 말 수 적은 아버지나 어머니 틈에서 자랐고 자신보다 훨씬 똑똑해서, 필요하다 여기면 꼬치꼬치 캐물어 답을 알아내고 납득해내는 사촌형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산은 자신이 부모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라고 물어보면...... 글쎄. 햇빛이 눈부시고 상처가 나면 아프다는 당연한 진리에 굳이 왜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 있을까? 실제로 애정이 진실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믿음 아래 진실이 있었다. 강산은 그냥, 그냥 그렇게 태어나 살았다. 아이인 시절부터 애정을 의심치 않았으니 표현이 없더라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럴수도 있지. 청년은 그렇게도 잘만 살았다. 유감스럽게도 갑작스럽게 들이게 된 아이가 강산보다 훨씬 섬세하고, 훨씬 정에 굶주렸고, 훨씬 부드럽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그렇게 홀로 살아갔을 것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가족이 없었던 소녀는 자신에게 뚝 떨어진─정확히는 자신이 '뚝 떨어진' 것이겠지만─보호자를 내내 막연하게 응시했다. 이 사람은 계속 내 옆에 있어줄 수 있을까? 한 번 쓰다듬어주고 가 버리지 않고, 내내 나를 좋아해줄까? 나를 사랑해줄까? 나를 보호해줄까? 나를 긍정하고, 존중하고, 성실하게, 그리하여 어쩌면...... 가족이 되어줄까? 청년은 놀랍게도, 물론 여신이 점지해 준 인연이니 당연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놀랍게도 그 조건을 모조리 충족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상대의 갈망과 상대의 애정을 알아차리기에 너무도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강산은 유채의 간절함을 몰랐고, 유채는 강산이 너무도 투박하게 표현하는 애정을 확신할 수 없었다.
불안을 머금고도 둘 사이는 그럭저럭 원만하게 보였다. 청년은 투박하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한 건 꼭 챙겼고, 아이는 불안하다고 해서 날카롭게 반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랑스럽게 웃어주는 아이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고 가는 청년은 겉으로 보기에 사이 좋은 보호자와 피보호자였다. 물론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혹은 불안하게 지켜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다. 아이의 불안을 민감하게 눈치챌 수 있는 포켓몬. 특히 아이의 보모 포켓몬 역할을 하고 있는 바라철록은 제 무딘 주인이 무척 못마땅했다. 아이는 확신을 원했다. 말없이 베푸는 애정이 아니라, 품에 끌어안고 너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내내 아낄 것이라고, 네가 먼 미래에 돌아가 되돌아오더라도 너는 내 귀여운 동생이고 귀여운 딸일 거라고 말해주기를 원했다. 아이는 가족을 원했다.
강산은 아이가 원한다 딱 한 마디만 말한다면 기꺼이, 아니. 도리어 어리둥절하다는 듯 되물을 게 뻔했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 아니었느냐고. 나는 이미 네가 아주 소중하다고. 아이가 이미 왜 그런 당연한 걸 굳이 묻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어이고, 이 멍청한 주인. 바보 주인. 못나고 못난 주인. 바라철록은 강산의 엉덩이를 뒷굽으로 뻥 차 주고 싶었다. 차봤자 왜 맞았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눈이나 껌벅이겠지만. 당신이야 바위고 강철이고 아무튼 둔해 빠져서 모르겠지만 유채는 평범한 아이의 감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데다가 당신과 만난지 반 년도 안되어서, 당신의 암묵적인 무언가 따위는 전혀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사촌인 난새는 태어난 순간부터 핏줄이라는 인연에 얽매여 미우나 고우나 당신이랑 오래오래 부딪히다보니 속이 터져도 당신을 대충 이런 놈이겠거니 이해한 거겠지만, 그러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고. 이제는 시간이 없다고.
유채가 용기를 내거나, 강산이 눈치를 채거나...... 어느 쪽이 더 빠를지 바라철록도 모르겠다. 한숨을 푹 쉬며 영리한 포켓몬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녀가 강산의 웃는 얼굴과 그 칭찬을 듣고 싶다는 가냘픈 욕심으로 조그마하게 힘을 냈으니, 잘 풀리면 좋겠다고 기도나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