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만난 사슴
물빛의 사슴은 그 공간에 앉아있었다. 사슴에 기대어 눈을 뜬 소녀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사슴을 돌아보았다. 두 번째 만나는 수호천사는 예전보다는 조금 더 우아하고 고상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짙푸른 색 눈동자는 걱정으로 일렁이거 있어서, 여전히 조금 주책이고 울보인 천사 그대로구나 싶었다. 다른 분들 천사는 믿음직스럽고 멋진 것 같던데, 정말이지. 마음 쓸 수밖에 없는 천사였다. 손을 뻗어 사슴의 목을 끌어안으며 하리는 그제야 정식으로 수호천사와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와 줄 줄은... 몰랐어, 하리."
"왜요?"
"나를...... 안 좋아했잖아."
아주 오래. 아주아주...... 오래. 천사의 속삭임에 하리가 잠시 침묵했다. 사슴의 목을 쓰다듬는 손길은 여전히 느리고 규칙적이었지만, 말이 없는 소녀를 천사는 가만 응시했다. 하리? 소녀는 저에게 묵직하게 닿는 천사의 무게라던가, 온기 따위를 침묵으로 삼켰다. 물론 이는 꿈이고, 천사와는 닿을 수 없는 것이 정석. 그러나 꿈속에서만큼은 이것이 현실이기에, 소녀는 별 거리낌없이 천사를 토닥이고 다시 앞을 보았다. 기대오는 하리오티를 천사는 사양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그랬죠."
"우우......"
"하지만 나도 알아요. 당신은 내게 각인을 주고 마법을 주고 나를 살려줬어."
갓 운석에서 깨어나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소녀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소녀의 운석이 떨어져 소녀가 깨어난 장소는 야생동물도 잘 살지 않는 곳이었고, 인간도 드물게 다녔다. 지금 소녀의 어머니가 소녀를 주워준 것은 수호천사의 힘이었다. 감정을 피어나게 만드는 힘. 어쩐지 이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묘한 직감. 어쩌면 간절한 부름. 소녀의 어머니는 강인한 신성기사였고, 아직 아기인 소녀를 살리기 위해 조금 내려온 수호천사의 힘은 강력한 것도 아니었어서 저항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다행히 천사가 내린 직감을 받아주었다. 직감 끝에 도달한 곳에서 울던 아기를 끌어안았다. 하리오티가 지금의 가족들의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천사의 덕분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다면 그에게 감사할 일 뿐이었다. 하리오티는 지금의 가족들을 사랑했고,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다섯 살 소녀가 드라이어드 사냥꾼에게 보쌈당할 뻔한 일. 당연히 소녀의 곁에는 형제들이 있었고, 미수였고, 하리오티 본인은 납치는 커녕 잠시 누군가에게 잡혔다가 정신차리니 다시 언니 품에 안겨있었다 정도의 소감밖에 없었던 일이었으나 그걸 어마어마하게 크게 인식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첫째는 가족. 둘째는 그녀의 걱정 많은 수호천사. 소녀의 사소한 불행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드라이어드의 특성상 낯가림이 심하고 경계심 강한 소녀는 알고 지내던 친구나 지인도 없이 집에서 꽁꽁 틀어박혀 가족에게나 겨우 마음을 열어주던 시기였다. 문제는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소녀의 걱정 많은 수호천사는 소녀가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슬쩍슬쩍 힘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도로에서 마차에 한 번 치인 소녀가 도로를 건널 때마다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천사는 상대의 마음에 호감을 심어주었다. 가족에게 보내는 것 같은 호의. 상대가 위험한 사람이어도 소녀만큼은 위험하지 않도록. 아주 작은 씨앗이었지만 분명하게. 신성기사인 소녀의 가족들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걱정했고 안심했다. 마법의 조절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걱정했지만 동시에 소녀의 안전을 그토록이나 신경쓰는 수호천사에게 안심했다.
하리오티는, 복잡했다. 저를 걱정하는 것을 알아도 마법에 대해 정확히 인지한 다음부터는 천사의 걱정에서도 벗어나고 상대를 수호천사의 마법에서도 벗어나게 할 수 있도록 자의로 다시 집에 처박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집 주변, 소녀가 아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곳의 산책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족 중 누구 한 명의 손을 잡고 뒷산에 올라가 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빛 받으며 낮잠 자는 게 제일 행복했다. 낯선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어도, 수호천사가 먼저 힘을 쓸까 염려되어 손도 내밀 수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상대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천성이 고집 세고 선하며 정의로웠던 소녀는 자신의 마법을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언니오빠와의 합의 하에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본 결과 자신의 마법의 한계를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랬다. 나는 누군가와 나 자신으로 만나보고 싶어요. 수호천사의 걱정에 휩쌓여 마법을 사용받는 것 말고 일 대 일로요. 그러니 당신이 나를 그만 걱정하게 될 때까지는 얌전히 기다려주겠어요. 하늘을 노려보며 제 천사에게 선언한 나이가 일곱. 그 뒤로 소녀는 제 마법을 꽁꽁 숨겼다. 낯선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천사도 주책을 부리지 않았으니 늘 다니는 행동패턴만 지키면 괜찮았다. 소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제 꽃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을 가지기도 했다. 좋은 향기인데, 하고.
소녀가 자라며 수호천사의 걱정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열 세 살이 될 즈음에는 낯선 사람을 보아도 걱정은 할 지언정 꾹 참고 지켜볼 정도의 인내도 생긴 것 같았다. 덕분에 소녀는 천사에게 쓸 데 없는 걱정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날아오듯 루케루카로 올 수 있었다. 엄마며 아빠며 두 언니오빠들도 걱정 역시도 태산같았지만 괜찮다며 밀어붙였다. 루케루카에 대해 알려주고 제의한 건 정작 본인들이면서, 소녀가 떠난다는 것을 걱정해 어쩔 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물론 소녀 역시도 무섭긴 했다. 천사든 가족이든 누군가의 보호 없이 사람의 앞에 혼자 서는 건,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겁과 긴장으로 내심 얼어 있던 소녀를 사르르 녹인 건 제 또래 친구들의 온기였다.
친구가 되자며 손을 뻗어준 유라도, 룸메이트로써 늘 다정한 디케이아와 누아도, 천사가 되겠다며 끌어안아 준 아일도, 에코, 블루밍, 돌로레스...... 그리고 루케루카의 상냥한 친구들을 만나 소녀는 행복했다. 마법이 없어도 제대로 타인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가족들이 나를 사랑해주고 친구들이 나를 믿어준다. 그 확신 하나로 소녀는 제대로 견고해졌다. 사랑받고 자라 사랑을 확신한 소녀는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멋진 꽃이 되었다. 등나무꽃 소녀의 가지에 잎눈이 맺히고 잎이 퍼졌다. 꿈이기에 가능한 급속한 성장이 소녀의 행복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푸르스름한 꽃나무가 되어 소녀는 행복하게 웃었다. 발간 뺨이며 한껏 휘어진 눈매와 입가가. 즐거워보이는 표정이...... 그녀의 천사가 원하던 하리의 모습 꼭 그대로라서,
"고마워요, 내 천사님. 덕분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
"하리......"
"난 더 강해질거에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검이 되고 싶고 방패가 되고 싶으니까."
"하리이......"
"아주 열심히 할 거에요! 뭐든지요. 신께서 내려주신 삶을 정말로 즐겁게 살고 싶어요."
"흑, 하리......"
"내 마법도 조금 더 아끼고 연습할테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계속 날 지켜줄거죠? 소녀의 속삭임에 사슴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소녀의 반짝반짝 빛나던 개나리색 눈동자가 눈앞에 선연했다. 오래 사랑했던 소녀의 강인함을 정면에서 지켜본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소녀는 꿈에도 모르리라. 잔뜩 젖었던 눈은 벌써 애저녁부터 뚝뚝 눈물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응. 천사가 속삭였다. 물빛의 사슴은 머리를 소녀의 품에 묻고 작게 속삭였다.
응...... 내가 언제나 너를 지켜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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