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다녀왔습니다."
"그래. 헤리 왔니."
다녀왔다는 깔끔한 인사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헬리오스는 그 익숙한 반응을 심드렁하게 넘기고 느긋하게 집을 살폈다. 벌써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으나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무튼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귀염둥이 막내가 중앙으로 공부하러 가 버린 지도 벌써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는 이야기였다. 평소였다면 헬리오스 역시도 이 분위기에 동화되어 방에 가서 쓸쓸하게 하리가 준 선물들을 살피거나 간식이나 입에 넣거나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헬리오스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도저히 지우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후후 웃고 있는 헤리오스를 이상하게 본 건 그의 쌍둥이 누이였다.
"뭐야 오늘 뭐 잘못 먹었냐? 왜이래?"
"셀레네.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하면 안 될 텐데~?"
"뭐래. 진짜 잘못 먹었네."
엄마 또 헬리오스한테 뭐 먹인 거 아냐? 안 먹였고 안 했어 이 지지배야! 싸늘한 시선으로 저를 보는 두 모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후후 음흉하게 웃던 헬리오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편지봉투. 직감적으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만, 경이로운 시력으로 편지봉투 위에 또박또박 적힌 하리오티 롭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두 사람이 곧장 손을 뻗었다. 내놔, 우리 하리 편지! 먹이를 잡아채는 매보다도 용맹하게 편지를 노리는 두 모녀 사이에서 날렵하게 빠져나요며, 헬리오스가 편지를 뜯었다. 여전히 손은 헬리오스를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날아왔지만, 평범하게 빼앗길쏘랴. 이 무슨 아쉬운 말씀. 내가 이걸 왜 고이 들고 왔는데. 캬, 나 진짜 착하다. 먼저 안 뜯어보고 같이 보고. 저 홀로 추임새를 넣으며 두툼한 편지를 펼친 헬리오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편지의 서두가 시작되자, 모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얼른 뒷부분을 읽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요리를 하던 아버지마저도 하던 것을 급히 정리하고 다가오는 모양새에, 헬리오스도 얌전히 뒷부분으로 눈을 옮겼다. 저 역시도 내용이 궁금한건 매한가지였다.
"안녕하세요, 하리오티에요. 잘 지내고 있나요? 가족들은 모두 건강한가요? 저는 건강합니다."
"내새끼 건강해서 다행이다만... 우리 연약한 막둥이가 거기까지 가서 몸이라도 상했으면 어떻게 해... 걱정할까봐 저렇게 써 둔 거면 어째?"
하리오티의 언니 셀레네는 주접을 떨었고 (셀레네는 신전 기사단에서도 말수 적고 과묵한 편에 속하는 무게 있는 신전기사였다.) 가족들은 무언으로 그에 동의했다. 헬리오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문구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 와 본 중앙은 아주 신기한 곳이었습니다. 교수님들도 아주 멋지고요. 다른 아이들도 많이 만났어요."
"우리 딸 낯가림도 심한데 잘 지내고 있을까?"
하리오티의 아버지는 영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수줍음도 타고 부끄러움도 많은데다가 반응이 주로 새침하여 초면에는 까칠하다는 인상을 주는 하리오티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친구를 사귀고 싶어했었다. 제 어린 딸의 수줍은 희망사항을 알고 있던 아비는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았다.
"이곳에서는 다른 친구들과 방을 함께 쓰고 있어요. 저는 디케이아라는 어인 친구와 누아라는 드라이어드 친구와 함께 방을 쓰고 있습니다. 룸메이트들은 다들 아주 좋은 아이들이에요."
"어인이랑 드라이어드인가. 막둥이는 다 처음 보던가?"
"처음 보지? 이 근처엔 바다도 없으니까... 드라이어드는 원래 좀 귀하고."
어인이나 드라이어드도 많나? 건너 들은 바로는 드라이어드가 우리 공주님까지 다섯이나 있다던데. 다섯? 진짜 많이 있긴 하구나. 두 쌍둥이 남매가 두런두런 말을 이었다. 지금 대화할 때니? 어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헬리오스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 학당에 왔을 때에는 많이 당황했지만, 지금은 꽤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늘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채집하는 건 정말로 즐겁습니다."
"막둥아 내가 채집 대신 해 줄 수도 있는데!"
"나도."
"하아..."
"주책 말고 얼른 읽어!"
아 알았어! 헬리오스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가끔은 가족들이 정말 보고싶을 때도 있지만 몽몽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친구들도 꽤 많이 사귀었습니다. 서로를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사람이 생긴 건 정말, 정말, 정말 기쁩니다. 이건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지만요."
"우리 막둥이가 우리가 보고싶대! 비켜봐 난 중앙에 가야겠어! 중앙기사 까짓거 내가 해내고 만다!"
"우리 공주님이 친구를! 으아, 집에 초대하고 싶다! 나도 얼굴 보고 싶어!"
"은퇴 취소하고 복귀하고 싶다...... 당신의 신실한 종을 중앙에 보내주세요 누스 님......"
"자, 다들 정신차리고... 제정신 잡아요 얼른."
아버지가 온갖 주접을 다 떠는 가족들을 온화하게 붙잡았다. 그런 아버지도 하리의 편지 문장에 마음이 들떠서 들썩거리고 있었으니, 롭 가의 중심은 단연코 하리오티였다. 하리오티가 집에 있었을 때에는 공주님처럼 막내를 보살피느라 늘 정신이 없었고, 소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에는 제 이름이 막둥이 아니면 공주님이라 착각했을 만큼 물고 빨았다. 하기야, 100살이 넘는 나이에 보게 된 어린 딸이나 70이 넘은 나이에 생긴 까마득한 막내가 어찌 귀엽지 않으랴. 하리오티가 가족들 앞에서만큼은 꽃처럼 활짝 웃으며 마냥 어리광을 피우는 데에는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학당의 친구들은 그런 모습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테니 절대 비밀이었지만)
물론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기까지는 꽤 많은 일이 있었고, 어린 하리오티는 제 혼자 맘고생하고 우는 일도 꽤 잦았지만, 지금은 모두 해결되고 롭 가는 견고하고 온전하게 행복했다. 막내가 친구를 원했기에 헬리오스는 루케루카 학당의 이야기를 물어왔고 셀레네는 막내의 입학 가불가 여부를 확인하여 막내에게 학당에 가는 것은 어떻겠냐 물을 정도로 사랑했다. 하리오티를 매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막내의 행복을 위해 학당에 보내준 것은 그들의 사랑법이었다. 등나무 소녀는 그런 가족들 품에서 자랐다.
"연금술이나 신성마법도 배우고, 흑마법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이것저것 배우는 게 다들 재미있었어요."
"우리 딸은 공부도 잘 하네."
"사실 공부같은거 못 해도 괜찮아.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건 맞아."
아, 쫌. 내가 읽잖아. 헬리오스가 한 번 투덜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채집을 위해 돌아다니다보면 종종 몬스터를 만나요. 운이 없는 날에는 자주 만난답니다. 특히 저는 사막을 자주 다니는데, 그래서 그런가 사막의 독주를 자주 봐요."
"사막의 독주?"
"그 전갈같은 걔? 나한테야 한주먹거리라지만 우리 하리가?"
아버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강인한 세 명의 모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그 연약했'던' 막내가 열심히 강해져서 눈의 여왕을 이기기 위해 아티팩트를 휘두르고 다닐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르는 얼굴로 가족들의 표정에 걱정이 번졌다.
"황야의 늑대 같은 것도 만들면서, 이러니저러니해도 힘내고 있답니다. 다음에 더 멋진 것을 만들어 볼 거에요. 집에 돌아가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을 거에요."
"귀여워라."
"귀여워..."
"우리 막내 귀여워."
그 뒤로도 편지는 한두문장 읽을 때마다 끊임없이 추임새가 이어졌다. 두툼한 편지에는 온갖 소녀의 사소한 일상이 즐겁다는 듯한 기색으로 종알종알 적혀 있었다. 돌로레스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거나, 아일이 내 천사님이 되어주었다거나, 첸이 바다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는데, 나도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던가, 수영을 배우고 싶어서 숨 참는 연습을 한다거나, 누아는 우리 방에서 유일하게 일찍 잠드는 친구라서 방에 들어가면 늘 자는 얼굴을 본다거나, 디케이아와 함께 별을 구경했다거나. 블루밍과 마얀은 상냥하고 좋은 친구들이고, 블랑은 누아의 쌍둥이인데 아주 고운 색 장미라던가, 그리트라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서 같이 피크닉을 갔다는 내용. 유라와 친구가 되어서 말을 놓았고, 사르힌은 아주 얄밉게 굴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그런 소녀의 행복한 일상이 빼곡하게.
그렇기에, 어린 소녀를 품에서 떼어놓고 오랫동안 걱정했던 가족들의 표정이 뭉근하게 풀어져 안심할 정도로 즐겁게 쓰여진 일상의 끝무렵을 소녀는 가족들이 만나고 싶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로 마쳤다.
"잘 지내고 있다면, 정말 다행이네......"
소녀의 글씨체로 빼곡하게 적인 편지를 쓸어내리며 소녀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안도해서 웃었다. 소녀는 드라이어드였고, 운석에서 깨어난 아기는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생존본능처럼 발현한 마법을 소녀는 내내 경계했지만 동시에 평생을 함께하며 살았다. 소녀가 이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녀로 살아왔던 이유는, 절반이상이 그녀의 사랑스러움이라고 가족들은 믿었지만, 마법의 덕도 역시 없진 않았으리라. 가족들은 하리오티에게 납치나 사냥꾼을 걱정하여 낯선 이에게 늘 조금씩은 쓰라는 말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소녀가 그 덕분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했다.
어쩐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소녀의 활짝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가족들은 집의 어린 막내에 대한 그리움을 삼켰다. 편지에 묻어 온 옅은 등나무 향기가 집을 뛰어다니는 것처럼 강렬하게 맴도는 느낌이었다. 어린 막내에 대한 그리움에 한숨을 내쉬며, 헬리오스는 편지를 단정하게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곧장 셀레네와 어머니가 편지를 다시 펼쳐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는 모양새를 보며 청년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귀여운 막내야, 이것 봐. 네가 마지막에 끝내 언뜻 비췄던 불안은 이토록이나 불필요한 기우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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