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s/Otohara Ruka

생각의 끝에는

별빛_ 2018. 12. 7. 00:51




 소년은 느릿하게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은 조금 땋아 반으로 묶어 늘어뜨린데다가 늘 곱게 빗질을 했지만, 조금씩 뻗치는 부분이 있었다. 루카는 제 머리를 완전히 얌전하고 반듯하게 만들기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교실의 앞쪽에서는 한창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늘 성실한 모범생이었던 소년은 오늘따라 유독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의 손은 펜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큰 의미 없이 몇 번 종이를 만지작거리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흰 종이에 닿았다. 

 생각에 빠진 소년은 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등학생이 되어 성장이 끝나고, 얼굴에 앳된 티만을 남기고 성인의 흔적이 묻어나기 시작하면서 그 무의식적 습관은 더욱 심화되었다. 펜 닿는 곳에 굳은살이 배인 손가락이 가만히 백지를 쓸어내렸다. 창가 근처에 앉은 소년의 시선은 책상에 박혀 있어서 언뜻 보기에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보였기에, 아무도 소년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았다. 창문을 가리는 커튼 사이로 짬짬히 쏟아지는 햇빛도 소년의 사고를 침범하지는 못했다. 도리어 심해와 같은 머리카락에 내리쏟아 파도처럼 소년의 머리카락을 밝게 만들기만 했다. 


 소년은 가끔 이런 식으로 생각에 잠겼다. 가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조금 자주. 어쩌면 종종. 늘 이런저런 공식과 계획으로 잔뜩 돌아가던 머리가 휴식을 주장할 때. 가끔 찾아오는 두통이 머리를 잠식할 때. 아무도 곁에 없는데 무엇을 할 지 생각해놓지 않았을 때. 악몽을 꾸고 난 직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괴로워져서 숨을 내뱉기 힘들 때. 그럴 때마다 소년은 잠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떠올린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쪽에 가까웠다. 그의 평화는 늘 한 명의 존재를 필요로 했다. 숨을 들이마쉬었다가 내쉬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아주 당연하게 소년의 머리를 빼곡하게 채워서 소년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큼 소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가 있었다. 

 늘 당신이 있어서......

 

 루카는 시선을 내깔고 흰 종이에 조금 눌러 쓴 글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좋아하는 이유를 꼽아 보자면 눈 한번 깜박이는 새에도 몇 개나 꼽을 수 있었다. 빛 아래에서 반짝이듯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 흰 피부와 자색 눈동자. 조금 거친 듯 보이지만 늘 저를 보면 상냥하게 풀어지는 표정, 다정한 목소리, 애정이 가득한 시선. 어렸던 자신을 내치지 않았던 그의 다정함과 내면의 성실함. 닿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자신을 배려하여 자신이 인내하는 그 마음가짐까지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가끔은, 그는 자신을 그저 동생으로만 보는 것인데 저 혼자 욕심을 내어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우울하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얽히고 곧장 휘어지는 그 자색을 응시하고 있다보면 그 불안함이나 우울함도 한없이 빛바래 희석되어 사라졌다. 보고 있자면, 언젠가 끝마쳐 없었던 것처럼 접혀진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을 믿고 행복해지고 싶어졌으니까. 

 

 당신이 왜 이렇게 좋을까. 소년이 천천히 눈을 감고 짧게 숨을 뱉었다. 저 홀로 시작했던 짝사랑에 응답해준 그에게 늘 감사하고 있었으나 소년은 언제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좋은 걸까. 당신은 나를 왜 좋아하는 걸까. 소년의 성정상 그는 답을 찾았다. 소년의 마음에 빠듯하게 들어차는 만족스러운 답은 아직까지도 내리지 못한 채였다. 

 가끔은 사랑에 의문을 품을 때도 있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까? 허나 소년 그 자체가 곧 그가 느끼는 사랑의 증거였기에, 의문은 곧 헛웃음과 함께 종식되었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떠한 이름도 붙을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 사이에서도 당신만 생각하면 다른 모든 게 사라져버렸다. 당신이 내 생각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이를 어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루카는 눈을 뜨고 커튼 사이로 조각처럼 언뜻 엿보이는 하늘을 보며 웃었다. 

 아, 당신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