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AU
무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일주일 전부터 동쪽 하늘이 심상치않다 직감하였던 무녀는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꼴에 낮게 혀를 찼다. 이제 동쪽 바다는 영력 없는 이가 보아도 이상할 정도로 하늘이 시커멓고 마른 번개가 쳤다. 천둥 울음 소리와 거친 파도 덕분에 뱃일하는 사람들도 바다 근처에 얼씬도 못 하는 모양새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녀는 바다가 왜 저리 심상치 않은지 이유도 알고 있었다. 요괴며 작은 신선이며 너나할것없이 수군거리는 게 귀에 생생하게 잘도 들렸다. 동해 바다 막내 아드님이 사라지셨다더라.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작은 용이라더라. 재능있고 총명하신 분이신지라 다음 대 용왕이 되실 귀한 몸이시라더라.
아무튼 용만큼 손이 많이 가는 족속도 드물었다. 자존심 높고 고고한 주제에 사고는 규모가 컸다. 무녀는 번거롭다며 혀를 몇 번이고 찼지만 그럼에도 별 수 없이 움직였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한달이고 두달이고 바다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호전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바다가 혼란하기 시작하며 여기저기 튀어나와 활개칠 성격 고약한 요괴들이나 악령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손을 쓰는 게 나았다. 무녀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사흘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못 찾는 게 이상할 정도로 어린 용의 존재감은 거대했다. 분명 마을에 발을 딛기 직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감춰져있던 기척이었다. 아직 백 살도 먹지 않아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용이라고 했건만. 확실히 잠재능력 하나만큼은 봐줄만했다. 무녀는 사뿐사뿐 걸어 어린 용의 앞에 섰다.
당연히 곱게 자랐을 용은 어느 골목길 담벼락 밑에 들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화려한 옷자락 끝은 조금 때가 묻어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그럭저럭 체면 차릴 정도로는 깨끗했다. 무녀는 티내지 않았지만 어린 용의 모습에 조금 감탄했다.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용은 의태에 서툴러 비늘이 그대로 보이거나 지느러미를 드러내거나 뿔을 숨기지 못하고는 했다. 이제 겨우 쉰 살 가까이 된 어리디 어린 용이니 몸의 반신이 의태하지 못한 용의 모습일것이라 예상했건만, 예상 외로 어린 용은 완벽한 어린 인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게 보면 다섯에서 많게 보면 여덟이나 되었을까. 가출한 지 거의 이주가 되었는데도 필사적으로 저를 찾고 있을 신하들에게서 몸을 숨기고 저를 잡아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릴 요괴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능력은 확실히 있었다. 재능있는 용이었다. 무녀가 부러 슬쩍 기척을 흘리자마자 용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희고 푸른 시선 사이로 가느다란 푸른 동공이 얇게 저며들었다. 뾰족하게 경계를 세우는 어린 용을 앞에 두고 무녀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말해야 순순히 이 용을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이었다.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 자로구나. 나를 찾으러 왔느냐?"
어라. 무녀가 눈을 둥글게 떴다. 어린 용이 먼저 말을 붙여올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녀는 느리게 고개를 한 번 기울기는 했지만, 순순히 답했다.
"맞아. 더 이상 바다가 소란스러워지면 지상도 이리저리 번거로우니까."
"내가 지금 많은 생명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건 안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아네? 무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면 돌아가야지. 이어서도 생각했지만 눈앞의 용은 무녀의 반토막이나 올까 싶을 만큼 작은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말이 바깥으로 튀어나가지는 않았다. 도리어 용의 입에서 상식적인 말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기도 했다. 한참 어린 모양새라 목소리조차도 앳되어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른스러운 말투와 어린아이 목소리의 갭이 뚝뚝 떨어졌지만.
"나도 내가 나온 목적만 달성한다면 바다로 돌아갈 생각이니 너무 심려치 말아라."
"목표가 뭔데?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한데."
"나를 도와 줄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라면."
무녀가 턱짓으로 재촉했고, 어린 용은 고민했다. 입가를 가리고 곰곰 생각에 잠긴 용이었지만, 대답은 금방 나왔다. 용이 들고 있던 반짝이는 작은 구슬─여의주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푸르스름한 번개가 번쩍이는 구슬은 사뿐히 날아 무녀의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용의 푸른 눈과 꼭 닮은 여의주는 영기를 머금고 번개와 함께 빛나고 있었다.
"드물게 강한 인간아, 네 말을 믿어 보마. 나는 만나고 싶은 이가 있어 뭍에 올라왔다."
"정인?"
"그, 그런 건 아니다."
새하얀 용의 뺨에 불그스름한 핏기가 돌았다. 아니긴... 무녀는 용의 감정이 눈에 선했다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린 용은 제 수줍음에 못이겨 이것저것 말을 터트렸다. 홍시마냥 점점 익어가는 뺨은 용을 마치 인간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정말 아니다. 나는 그저, 용궁에서 마을을 구경하다가 본 이가 어여뻐서. 그저, 그래. 한 번 대화를 해 보고 싶어서......"
"그래그래, 한눈에 반했다고."
"그러니까 그런 건 아니라니까!"
여의주에서 짜릿하게 번개가 튀어올랐지만, 주인의 수줍음을 반영한 것인지 정전기에 비슷한 수준의 전력이었다. 그래그래, 알았어. 무녀가 두 손을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치렁치렁한 비단 소매를 제대로 정돈하고 옷에 묻은 흙먼지까지 털어낸 어린 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녀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골이 난 모양새였으나,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어려서 그런가, 이제껏 무녀가 보아온 그 어떤 용보다 제일 상식적인 용이었다. 무녀는 용을 덥석 안아들었다. 내내 낯선 인간의 다리로 걸어야만 했던 용은 지쳐 있던 것인지, 무녀의 손길을 딱히 뿌리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만나고 싶다는 존재는 어떻게 생겼는데?"
"심해를 닮은 짙은 흑빛 머리카락에, 제비꽃보다 고운 자색 눈동자를 하고 있다. 피부는 희고, 키는 크고. 눈매가 날카롭다."
"음~. 뭐 아주 흔하진 않아도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사내의 외형을 하고 있다. 이 근처에 사는 것으로 보았는데."
"어."
어...... 무녀는 잠시 제 품에 안겨 눈을 둥글게 뜬 용을 응시했다. 어...... 그리고 잠시 허공을 보았다. 네가 말하는 게 누군지 어쩐지 나 좀 알 것 같다. 용을 품에 끼고 무녀는 터벅터벅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말이더냐? 아무것도 모르는 용은 기쁘게 웃기만 했다.
긴 인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