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s/Otohara Ruka

여행의 준비

별빛_ 2018. 11. 12. 03:13



[야, 루카. 니 지금 뭐랬냐? 여행?]

"응, 여행."


 루카가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길 가는 사람도 돌아볼 정도로 섬세하게 생긴 아름다운 소년의 미소였지만, 상대 소년을 응시하는 시선에 어이없음이 낭낭하게 섞여 있었다. 루카는 제 오랜 친구의 속 터짐을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나 친구가 된 화면 너머의 소년은 지금 오키나와까지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는 좋은 벗이었다. 물론 저 좋은 벗의 입버릇은 너새끼랑 친구가 되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한탄이었지만. 루카는 친구의 속터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좋은 능력까지 있었다. 


["내가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짜 이 자식이 좀 메롱해졌네. 여전히 머리는 잘 굴러가냐?"]
"응. 딱히 이상해진 곳은 없어."

["그럼 내가 다음에 할 말이 뭔지 예측은 가겠지."]

"아마도 '니 정신상태로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가지 마!' 대충 그 정도?"
["정확하다, 이 말뼈다귀 같은 놈아!"]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 남 있으면 제대로 잠도 못 쳐자는 놈이! 당장 약먹고 병원이나 꼬박꼬박 다녀! 잠깐, 여행도 혼자 다니는 거 아니지! 혼자면 여행까지 할 리가 없지! 누구랑 가는데! 진짜 수면부족으로 쓰러질거냐, 임마!

 

 아이고야. 루카가 귀를 슬쩍 막으며 웃음을 흘렸다. 긴장감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미소였다. 세이슈는 걱정이 너무 많아. 도리어 느긋하게 이어지는 말에 화면 너머 오키나와의 소년은 진짜로 뒷목을 잡고 싶어졌다. 아, 과거의 나여. 대체 왜 오토하라 루카 이 웬수랑 친구가 됐냐. 저 얼굴이랑 영리해보이는 행동에 속았어 속았어. 대형 사기를 당했다고. 


["야. 나 진심이거든? 상태 호전된 거면 제깍 보고해라."]

"미안, 호전은 안 됐어. 그냥 현상 유지야."

["여전히 수면제랑 진통제 먹고 나서야 겨우 잔다 이거겠네. 너 솔직히 말해. 진통제 먹는 숫자 늘렸지."]

"세이슈,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네놈을 너무 오래 알았다는 뜻이거든! 좀 예측 좀 벗어나라 이 답답아!"]


 노트북 너머의 세이슈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루카는 조용히 뺨을 긁적였다. 낮도 밤도 선배들과 함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진통제 양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통증은 기분 좋다고 사라져주지 않았으니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픈 티를 내고 다닐 수는 없잖아. 루카는 뻔뻔하게 그리 말했고, 세이슈는 다시 한 번 천불을 삼켰다. 아무튼 저 녀석이 친구가 아니라 웬수지. 세이슈는 천 번도 넘게 했던 말을 또 한 번 읊조리며 화를 삭혔다. 


["여행 같이 가는 사람들 중에 너 밤에 잠 똑바로 못 자는 거 아는 사람, 밤마다 끙끙 앓는 거 아는 사람. 둘 중 하나라도 있냐?"]

"음~ 한 명?"

["아예 없진 않아 다행이다, 그래."]


 사람은 아니지만. 루카가 내심 눈을 데굴 굴렸다. 둘 다 아는 건 당연하지만 크랩몬 뿐이었다. 잠을 똑바로 못 잔다는 건 눈치 빠른 선배들이라면 상당히 알고 계실 것 같기는 하지만......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니까. 아니 굳이 알려줘서 걱정 살 짓을 왜...... 루카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소년은 선배들에게 꽤나 귀여움받고 있었으니, 괜히 걱정 살 일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누구에게 먼저 아프다 털어놓는 성정도 아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크랩몬은 하루종일 한 번도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경우였고. 그리고 파트너 디지몬은 좀 특별했으니까. 


["그, 누구야. 너가 경계 좀 낮아지는 사람들 있다며. 잠 잘때 곁에 와도 괜찮은 사람들. 그 사람들도 같이 가냐?"]

"응. 둘 다 같이 가."

["으, 열라 짜증나지만 너 내가 말리든 말든 한귀로 흘려버리고 그냥 갈 거지?"]

"뭘 물어, 괜히 기분만 상하게."

["그러게. 진짜 괜히 물었네.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당장 오키나와로 돌아와, 짜샤. 불쾌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친구를 보며 루카는 웃음을 삼켰다. 순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헤실거리는 루카를 보며 세이슈는 팔짱을 꼈다. 자기 약한 모습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보여주려는 고집불통이니 여기서 저가 말 더 얹어봐야 잔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이슈조차도 루카의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기숙사도 1인실을 쓰는 녀석에, 기척은 또 더럽게 민감하고 옅게 잠들어서 사람이 다가오기만 하면 벌떡벌떡 눈을 떴다. 그런 놈이 다른 사람이랑 같이 여행을 가......? 잠깐만. 세이슈의 시선이 일순 가느다래졌다. 


["야, 루카. 너 최근 일주일동안 몇 시간 잤어."]

"어? 어...... 음......"


 루카가 무심코 손가락을 헤아렸다. 하나, 둘...... 손가락은 열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채우고 한 손가락을 넘길까 말까 멈췄다. 열 시가안? 화면 너머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날카로워졌다. 


["이 새끼 진통제만 먹고 수면제 잘 안 먹는구만?!"]

"세이슈, 그럼 여행 다녀와서 보자. 또 연락할게. 금방 할게."

["야, 잠깐만! 야! 오토하라 루카! 이 새,"]


 뚝. 루카는 망설임없이 화상통화를 끊고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가방에 노트북을 넣은 루카는 짐을 헤아렸다. 병원 가서 약 더 받아왔고, 물이랑 건량이랑 초콜릿 여러 개에다가... 필요한 건 노트북 있으니까 이거 쓰면 되고, 전기는 베타몬이 도와준댔으니까 괜찮고. 붕대 같은 것도 더 챙길까? 소년이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