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_ 2018. 11. 7. 01:13




 야근하는 경찰의 경찰차를 타고 집앞에 선 루카는 짧게 숨을 뱉었다. 오토하라 가문은 대대로 경찰직에서는 아주 유명한 앨리트 집안이었다. 현재 아버지조차도 젊은 나이에 계급으로 따지면 경시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고, 이미 은퇴했지만 고위직을 휩쓸었던 어른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들 역시도 한둘이 아니었고. 유구한 경찰의 엘리트. 일본경찰의 기둥이라는 별칭까지 있는 번듯한 집안. 그런 집안의 본가 혈통의 유일한 외동아들은 오늘 백화점에 무단침입해서 기물파손을 하고 왔지만. 젠장맞을. 손가락 꼼지락조차 겨우 할 나이의 어린시절부터 학습된 도덕심과 정의감은 오늘도 열심히 일했다. 현실과 살짝 타협하긴 했지만.


 새벽은 고요했다. 달 뜬 모양새를 잠시 응시하던 루카는 곧 조심스럽게 집 문을 열었다. 대문은 소리없이 매끄럽게도 열렸다.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소년은 띄엄띄엄 불이 켜진 방을 보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큰 누나는 자고 있을 거고, 작은 누나 방도 불 꺼져 있네. 집에... 있으려나. 안방은 켜져 있지만 아버지 서재가 켜져 있으니 어머니만 주무실 거고. 할아버지는 이미 주무시고... 부엌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쇼코 아주머니는 아직 깨어 계시고. 손님방 꺼져 있는데 차임막이 걷혀져있으니까 손님은 오늘은 없나. 불 꺼진 제 방 창문을 한참 들여다보던 소년이 곧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깐 살펴보는 것으로 집안 돌아가는 꼴을 적당히 파악한 소년은 별 망설임없이 서재로 향했다. 

 두 번의 노크와 동시에 안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들어와라. 낮은 목소리에 루카가 잠깐 제 옷차림새를 살폈다. 오늘은 맞고 구르는 일이 없어 다친 적도 없었다. 먼지 터는 시늉을 하고 옷에 주름잡힌 곳 없다 확인을 끝마친 소년이 문을 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퍽 고요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년이 딱 서른 살만 더 먹는다면 꼭 저렇게 자라겠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외형으로. 


"저 왔어요, 아버지."

"그래. ......못 본 사이 꼴이 꽤 볼 만 하구나."

"어쩌다보니."


 소년의 얼굴 꼴은 여전히 화려했다. 소년은 덤덤히 대꾸하며 아버지의 앞에 앉았다. 반듯하게 편 자세로 멀끄러미 시선 맞대는 꼴이 퍽 당당했다. 제 아버지가 자식들 보는 눈에 단 한번도 무심함이 가신 적 없었으니, 루카 역시도 가족들에게 향하는 정 중 아버지에게 향하는 것이 제일 옅었다. 남보단 가깝지만 가족보다는 멀찍한 미묘한 간격을 유지하며 꼭 닮은 부자는 마주앉았다. 


"니지무라 댁 아들에게 계속 신세지고 있다고 들었다."

"하토라 형한테는 늘 신세지고 있죠. 참고로 이 꼴이랑 관계 없어요."

"어디서 얻어 터지거나 차라도 치인 꼴로 눈앞에 앉아 있다만. 네 나잇대 소년의 뺑소니 신고는 들어온 게 없다."

"병원도 갔고 약도 바르고 있어요."

"루카."

"전 괜찮다고 말했어요, 아버지."


 소년의 푸르스름한 눈매가 느릿하게 좁혀졌다. 더 이상 제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두 부자는 서로의 영역을 적당히 존중하고 살아왔고, 그 영역을 침범할 정도의 애정은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어렵잖게 입을 다물었다. 아들이 털 세우고 괜찮다 감싸는 것을 굳이 헤집을 이유는 그에게도 없었다. 그는 손쉽게 그 다음 용무로 넘어갔다. 


"아무리 휴일이라지만, 경찰차를 멋대로 얻어타지 마라."

"그건 저도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과드리러 여기 왔고요."

"이케부쿠로 선샤인 시티에는 무슨 볼일이었지?"

"그 근처에 개인적인 볼일이 있었어요."

"요즘 본부 분위기는 충분히 흉흉하다, 루카."


 더 날카로워질 일을 만들지 마라. 덧붙여진 말에 소년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경찰 본부가 왜 흉흉한지 모를 바는 아니었다. 디지몬의 존재. 그를 모르는 사람들 눈에 디지몬이 어떻게 비칠지도 아주 잘 알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조금 수척해보이는 것도 같았다. 지쳤으리라. 영리한 아들의 침묵에 아버지는 가벼이 손짓했다. 나가보라는 신호였다. 루카는 별 거리낌없이 밖으로 나섰다. 부자의 대화는 용건만 나눈 깔끔한 대화였다. 차라리 아버지와의 대화는 속이라도 시원했다. 할아버지처럼 속이 쓰리고 서러워지지는 않았으니까. 


 가방에 달린 문장을 한 번 가벼이 쥐었다가 놓은 루카는 곧 그 옆에 달린 디지바이스를 두어번 톡톡 두드렸다. 금방 돌아갈거야, 크랩몬. 작은 신호였다. 루카는 부엌으로 통하는 복도를 가로질러 불 켜진 그곳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쇼코 아주머니, 계세요?"
"어머나,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


 살갑게 웃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루카의 얼굴에도 그제야 옅은 미소가 번졌다. 좀 전에요. 근데 다시 나가 볼 거에요.


"이 시간에요? 주무시고 가시지...... 아침에 만나뵈면 큰 아가씨도 좋아하실 거에요."

"아즈사 누나는 잘 지내요?"
"요즘 얼굴에 꽃이 피셨어요. 정말이지 어여쁘시답니다. 행복해보이시고요. 가끔 도련님을 찾으시기는 하시지만..."
"결혼식 일주일 전에는 꼭 들어올게요."


 미안해요, 아주머니. 아니에요, 도련님. 저는 괜찮답니다. 다정하게 덧붙여지는 목소리에 루카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히오리 누나는......"

"작은 아가씨께서는...... 집에는 들어오셔요. 큰 아가씨나 마님과 대화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래요."

"도련님, 작은 아가씨는..."

"됐어요."


 괜찮아요.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참잠하게 가라앉은 표정에 흰 초승달 닮은 미소만 옅게 그려져 있었다. 아주머니의 얼굴에 조금씩 슬픔의 색이 묻는 것을 보며 루카가 먼저 손을 휘저었다. 괜히 말을 꺼낸 기분이었다. 


"하토라 형 집으로 돌아갈 건데, 같이 먹을 간식거리 없을까요?"
"어제 저녁에 선물로 들어온 메론이 있는데, 달고 맛있던걸요. 아, 타르트도 있는데 이것도 가져가셔요."

"고마워요."

"니지무라 도련님께는 늘 감사하시다고 전해주셔요."


 그럴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쇼코 아주머니. 소년이 집밖으로 나섰다. 시부야의 하토라 집으로 향하는 방향은 이제 눈 감고도 짚을 수 있었기에, 양손 무겁게 들은 루카는 디지바이스를 귓가까지 가져다대고 소근거렸다. 얼른 돌아가자, 크랩몬. 돌아가면 메론 깎아줄게. 다들 나눠먹자. 맛있을 거야. 낮게 소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디지바이스 속의 크랩몬은 눈만 껌벅였다. 못 본 사이 루카는 훌쩍 자라 있었고, 많이 변해 있었다. 루카, 오늘 소멸한 디지몬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주지 않을 거야? 지금의 루카는 슬퍼 보여. 내가 좀 더 자라면 루카를 더 멀리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 텐데...... 크랩몬이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루카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곳에 도착해 있을 것임을 알았다.